이대 출신 악녀 박마리아, 출생 이기붕 국일관 쌍권총 묘 후손
박마리아 출생, 민며느리
박마리아는 1906년 4월 19일 강원도 강릉시에서 아버지 박명삼과 어머니 고의대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다른집 아이를 봐주기도 하고 남의 집 밭일을 도와 주며 가신이 두모녀가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박마리아는 어린나이지만 가난에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박마리아가 보통 학교를 졸업한 때인 13세에 민며느리 제안이 들어 왔지만 박마리아는 거절하였다.
[민며느리는, 어린나이에 결혼할 남자집에 미리 들어가 살다가 결혼하는것]
박마리아 어머니 고의대는 감리교 목사 정춘수의 가정부로 일하더중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박마리아가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목사 정춘수의 도움으로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박마리아 이화여대(이화여자전문학교)
박마리아는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 입학하여 기독교 신자의 딸이라는 명목으로 학비를 면제 받았고,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그렇게 어렵게는 생활하지 않았다.
개성 호수돈여자보통학교는 한참 선교활동이 활발할때 선교사들에 의해 세원진 감리교계의 학교로 명문으로 불리었다.
이후 1924년 박마리아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한후, 박마리아는 공창제의 폐지, 금주 금연등 계몽적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작은 영웅으로 불리었으며,1928년 졸업하여 모교로 돌아가 교사 생활을 하였다.
박마리아가 모교의 영어선생으로 재직하던중,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아펜젤러의 추천서를 가지고 미국으로가 스카릿 대학을 졸업한후, 밴더빌트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박마리아 이기붕 결혼, 자녀, 국일관
이기붕의 호는 '만송'으로 1896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산리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나, 과부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아주 데이버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후 귀국하여 이승만을 만났다.
박마리아와 이기붕은 미국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만나 1931년 약혼을 하였으나 박마리아가 다시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약혼은 취소 된듯하였다가 이기붕도 귀국하면서 두사람은 다시 만남을 이어갔다.
귀국한 이기붕은 가회상회를 운영하다 실패한후,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하는 종로 국일관 지배인을 지내며,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하였고, 건축청부업, 광산등 잡다한 일을 많이 하다 해방이후 이승만의 2인자가 된것이다.
박마리아는 귀국한후 모교인 이화여자전문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윤리학을 가르켰고, 이기붕과 결혼한후 박마리아는 기독교 여성 청년회인 YWCA의 총무를 맡고 있으면서, 장녀 이강희,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 세아이를 출산하였다.
2022.12.15 - [나누고 싶은 글] - 장웨이제 - 중국 미모의 아나운서 불륜으로 임신한채 실종 인체표본이 되다 (다롄시장 보시라이)
박마리아 친일 활동
일본이 조선의 YWCA(기독교여성청년회)와 일본의 YWCA와 통합을 하여, 조선의 YWCA는 독립성을 잃게 되고 그러자 애국여성들은 YWCA대거 탈퇴를 하였다.
통합된 YWCA 남은 박마리아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은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전국을 돌며 황국신민(일본제국의 백성) 내선일체(조선을 일본에 통합)를 외치며 정신대 모집과 국방헌금을모아 일제에 헌납하는등 노골적인 친일 활동을 하여, 해방이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김활란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박마리아는 1942년 5월 열린 간담회에 나서 "사람은 한번 나서 한번 죽을것을 그리들 무서워 할게 무엇일까요, 나라를 위해 한번 몸을 바친다는 것을 얼마나 떳떳한 일이냐"라며, 중일 전쟁과 태평과 전쟁에 징병대와 정신대에 참여할것을 부추겼다.
박마리아 권력과 남편 이기붕 자유당 2인자
이기붕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으며 프란제스카 여사와 박마리아 또한 매우 가깝게 지내, 이승만이 집권과 동시에 이기붕은 이승만의 비서직을 맡은후 1942년 서울시장을 지냈다.
한국말을 못하는 프란제스카는 영어를 할줄하는 박마리아와 친할수 밖에 없었다.
이기붕이 출세길을 걸으면서 박마리아도 YWCA 회장이 되었고, 반관반민 통합 우익여성단체의 대한부인회 부회장과 이화여대 부총장을 맡으며 온갖 권력을 휘둘렀다.
박마리아와 이기붕이 살고 있는 서대문 자택은 제2의 경무대라 불리었다.
이승만의 청화대 비서관을 지낸 박용만은 박마리아를 일컬어, "박마리아는 굉장한 에고이스트로 퍽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하여 콧대는 지나치게 높았으며, 퍽 인색하여 남에게 자기 쌀 1톨을 주는 법이 없으며, 남이 주는것은 대로 받았다고 한다<박용만 경무대비화, 1995년>
박마리아 아들 이강석 이승만의 양자가 되다.
이기붕은 1956년 제4대 부통령 선거 출마하여 패하여 2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박마리아는 자신의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입지를 다졌다.
이후 이기붕은 제5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부인 박마리아와 함께 온갖 부정 선거를 저질러 부통령에 당선이 되었지만 얼마안가 4.19 혁명이 터졌다.
4.19혁명이 터지자 이승만은 스스로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고, 한국에 남은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국민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아, 자신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였던 이강석을 서울대에 부정입학 시킨것이 적발되어 서울대 법대생들의 항의가 빚발쳤다.
박마리아 이기붕 최후, 쌍권총
시민들은 서대문 박마리아 집에 처들어가자, 박마리아와 기붕은 뒷문으로 도망쳐 지인의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평소 박마리아의 도움을받았던 지인들은 아무도 박마리아 부부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였던 이강석은 960년 4월 28일 두자루의 권총을 가지고 자신의 어머니 박마리아 아버지 이기붕(향년 63세) 그리고 남동생 이강욱을 차례 쏘아 살해한후 자신도 그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권력을 탐하던 박마리아와 이기붕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박마리아와 이기붕의 제2의 경무대라고 불리던 집은 국가에 환수되어 4.19혁명 기념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박마리아 이기붕의 이야기는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언급되었다.
[박마리아 이기붕의 일가족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다르다]
이기붕 박마리아 묘
두사람의 묘는 망우리에 있었으나 친인척이 말없이 어디론가 이전한것으로 보이며, 망우리에는 이기붕 박마리아 그리고 두아들의 묘도 찾을수가 없으며 후손은 딸이 있었지만 알려진것은 없다.
2024.08.05 - [스타 이슈] - 배철수(가수)나이 학력 프로필 과거 집안 결혼 자녀 부인 PD 박혜영
2024.07.12 - [나누고 싶은 글] - 정몽규 나이 키 재산 프로필 부인 김나영 정주영 가계도 클린스만
2024.04.20 - [스타 이슈] - 박영규 4혼한 25살 연하 아내, 전 배우자들, 나이 아들 프로필, 김수련
2024.03.11 - [스타 이슈] - 김승수 재산과 첫사랑 이별, 양정아와 결혼? (프로필)
2023.11.03 - [스타 이슈] - 김국진 전처의 만행 (ft.프로필, 이혼, 재혼, 전 여친, 국진이 빵, 강수지, 이윤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