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 그는 왜 아버지 손에 죽어야 했나? (ft. 뒤주, 영조, 정조 이산,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 (思悼世子)
사도세자는 영조대왕(42세)과 후궁 영빈 이씨(40세)와의 사이에서 1735년 1월 21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영조는 25세 되던해에 정빈 이씨와 첫 아들 효장세자를 두었으나 효장세자는 10살에 이유없이 죽고 만것이다. 그러니 사도세자는 영조에게는 두번째 아들인 것이다. 경종과 사도세자는 이복형제.]
그당시 42세인 정조대왕의 후사가 없어 나라에서 큰 시름을 하던차에 아들이 태어나자 즉시 왕비 정성황후 서씨의 양자로 공식 입적하여 원자로 정하였고, 돌이 지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조선의 최연소 세자가 된것이다.
성은 이 (李)
이름은 선 (瑄)
본관 전주 (全州)
자는 윤관 (允寬)
호는 의재 (毅齋)이다.
세자는 태어난지 100일도 되지않아 어머니 영빈이씨와 떨어져 유모에게 맡겨져 창경궁 저승전에서 자라게 되면서 그곳이 세자의 처소가 된것이다.(세자의 처소를 동궁전이라 불렀다)
창경궁 저승전은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 어씨가 처소로 쓰던 곳으로 1730년에 선의왕후가 승하한후 이곳을 세자의 처소(동궁전)로 쓰도록 영조가 지시한 것이다.
[영조는 자신 왕이 되기이전 이복 형인 경종이 아프자 입맛을 차리라며, 간장게장을 갖다 주었는데, 그것을 먹고는 경종의 병이 더 악화되어 경종이 죽자,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와 다른 계파(노론)의 대신들이 영조가 왕이 되기위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승전은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가 쓰던 처소로 선의왕후가 죽자 비어있었던 저승전을 어린 세자(사도세자)의 처소(동궁전)로 쓰게 했던 것이다. 저승전에서 선의왕후가 부리든 상궁들(노론계)이 어린 세자를 보필하며, 세자에게 나쁜것을 가르치고, 칼 놀이를 하게 한것이 세자가 잘못되게된 원인이었다고, 한중록과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어린시절
영조는 세자가 15개월이 되자 세자 교육을 위해 <세자 시강원>을 만들어 세자의 조기교육을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세자는 어려서 부터 매우 영특하여 3살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하였으며, 8세때에 직접 친필로 <동뭉선습>등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베끼기도 하여, 아버지 영조가 세자를 매우 기특하고 예뻐하였다고 한다.
세자가 10세가 되어서 참봉인 홍봉환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혜경궁 홍씨)하고 세자빈으로 맞았으며, 세자는 어린나이지만 정치적인 안목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세자는 아버지 영조로 부터 학문에 열중하는게 세자의 도리라고 배워 학문에만 열중하였은데, 세자의 처소 궁녀들인 이상궁과 한상궁이 세자에게 칼과 칼집을 주면서 전쟁놀이를 하면서 놀게 하였던 것이다.
[이 궁녀들은 선의 황후가 죽기전 데리고 있던 궁녀들이었다]
세자는 칼을 가지고 전쟁놀이를 하는것에 재미를 들였고, 이후 글공부는 소홀해지고, 어머니 영빈 이씨에게는 글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거짓말을 하는날이 날로 많아졌다.
이것을 알게된 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세자의 처소 저승전(동궁전)으로 찾아가 세자를 크게 꾸짖었고, 이상궁과 한상궁은 이로인해 궁밖으로 쫒아내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이후 형벌을 내려 죽였다고 한다.
세자는 아버지 영조대왕에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칼과 활을 가지고 노는것을 좋아하며 말타기를 즐겼으며, 그로인해 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심한 꾸지람을 자주 듣게 된다.
사도세자 우울증과 의대증(옷병)
영조는 세자가 글공부를 소홀히하고 무술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지자, 아버지와 아들 세자사이가 날로 나빠져 세자가 아버지 영조에게 문안을 가면은 영조는 세자가 못 마땅하여 허구헌날 세자에게 뜨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영조는 아들 세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않자 문안을 오면 세자의 걸음걸이, 입고있는 옷을 가지고 매번 꼬투리 잡아 대신들이 다 있는 앞에서 세자에게 핀잔을 주기가 일쑤였고, 또한 영조는 백성들이 비가안와 가뭄이 들어도, 겨울에 날씨가 나빠 천둥이 쳐도, 나라에 무슨 일이 생겨도 모든게 영조는 세자탓으로 돌렸다.
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하도 꾸중과 핀잔을 많이들어, 문안을 가기전에 옷을 있는대로 바꿔입으며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옷에 귀신이 쒸였다"라고 하며 나중에는 발광을 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정신병증으로 헛것을 보기도 하였다.
[내관들은 사도세자가 옷을 한번 갈아입기 위해 열벌이상의 옷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놓고는, 사도세자에게 트집과 꼬투리를 잡는게 더욱더 심하였고, 그로인해 사도세자의 정신병증은 날로 심해졌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어느날 사도세자는,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글을 모시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우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듯 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수 없습니다" 라고 아무도 몰래 장인에게 편지를 보내 울증을 다스리는 약을 구해 달라고 한다.
사도세자는 또
"이번 약을 복용한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 합니다"라고 장인에게 약을 먹어도 울증에 아무런 효염을 보지 못한 것을 알린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문안을 가기위해 옷을 갈아입던중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옷을 갈아입혀주는 내시 김한채의 목을 베어, 벤 목을 들고 온 궁궐을 돌아다니며 아내인 세자빈(혜경궁 홍씨) 처소까지 가게 된다.
그날 혜경궁 홍씨는
"그때 당번 내시 감한채를 죽여
그 머리를 들고 오셔서 내인들에게 보이셨다"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그 흉하고 놀라움을 어찌 이를 수 있으리오"라고 세자빈(혜경궁 홍씨)은 한중록에 기록하였다.
이것을 본 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세자빈)은 너무 놀라 소스라치게 되고, 급기야는 영조에게 까지 이말이 들어가 영조는 또한번 아들세자에게 노발대발하게 된다.
사도세자 아버지 영조를 죽이려 한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왜 사람을 죽였느냐고 물으니,
사도세자는
"마음속에서 화가 올라오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같은 짐승을 죽여야만 마음이 풀립니다"
영조는 왜 그러냐고 묻자
"마음이 상하여 그리합니다
부왕(아버지 영조)께서 사랑하지 않으시기에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섭워 화가되어 그러합니다"라고 아버지 영조에게 말하자, 영조는 이말을 듣고는 다시는 세자를 꾸중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에도 사도세자는 1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더 죽이고, 궁궐에서 여자와 술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면서 사도세자는 "칼을 차고가서 어떻게 해 버리고 싶다"라고 하였고, 그것은 아버지 영조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이었다.
급기야 사도세자는 칼을 차고 아버지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갔었는데 차마 아버지 영조를 어떻게 못하고 돌아선다.
사도세자가 칼로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말을 전해들은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이씨는 크나큰 결심을 하고 영조(남편)을 찾아가 사도세자에게 대처분을 내려달라고 읍소한다.
사도세자 어머니 영빈이씨는 영조(남편)에게
"소신이 차마 이 말씀은
모자지간의 도리로 보아 못 할 일이지만
옥체를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편안히 하는 일이 옳으니 대처분을 하소서"라고 간언을 한다. 즉 사도세자를 죽이라고 한것이다.
사도세자와 뒤주
영조는 사도세자가 있는 창경궁 휘령전으로 가 사도세자를 불러놓고는 칼을 던져 주며 자결하라고 하자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지만 영조는 자결하라고 한다
그러자 사도세자가 칼을 들고 자결을 하라하자 신하들이 말리면서 난리법석을 떨다 해가 기울고 영조는 하는수 없이 뒤주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뒤주 속에 사도세자를 가두자, 사도세자가 좁고 답답한 뒤주를 부수고 나온것이다.
그러자 영조는 내관들에게 다시 뒤주를 가져 오게하여 뒤주 속에 사도세자를 가두고는 뒤주를 밧줄로 꽁꽁 묶고 뒤주 주변을 풀덩이로 모두 막아버리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보초를 세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뒤주옆에서 보초를 서든 훈련대장 구선복과 그의 부하들은 뒤주에다 오줌을 싸고, 뒤주 옆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희롱하였다고 한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8일째 된던날 뒤주에 구멍을 내어 사도세자가 죽은것을 확인한후 뒤주에 꺼내어 장사를 치루었는데, 좁은 뒤주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다리는 펴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28살 젊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사망하게 된것이다.(1762년 7월 1일)
그리고는 영조는 자신의 아들 왕세자인 이선이 죽고난후 아들 이선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자로 복권시켰다.
그리하여 '사도세자'라고 칭한것이다.
[즉, 사도세자는 세자가 죽은 후에 붙여진 호칭이다]
사도세자 부인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뒤주속에 갇히자, 죄인의 아내로 세자빈에서 폐서인 되어, 아들 이산과 함께 궁궐에서 쫒겨나 사가(친정집)으로 가게 되어 자신의 서글픈 처지를 한중록에 이렇게 적었다.
사도세자 아들 이산 정조
사도세자가 죽은후 사도세자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 그의 아들 이산은 궁에서 쫒겨나 얼마간 사가에 있다가, 영조가 다시 궁궐로 불러들여, 사도세자 아들 이산을 세자에 책봉한뒤 영조가 죽은후에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이산이 정조대왕이며 영조는 이산 정조의 할아버지, 사도세자는 이산 정조의 아버지 인것이다.
영조는 왕위에오를 이산에게 절대로 사도세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였으나, 정조는 왕위에 오른후 대신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였다.
[영조는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수 없으므로, 이산 정조를 경종의 양자로 입적 되었기 때문이다]
▶후대 역사는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 계파의 희생양이었다고 평하며,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 아들 즉 손자 이산을 지키기위해 사도 세자를 의도적으로 죽였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왜냐면 사도세자가 궁궐의 사람들을 100명이상 죽였으며, 허구헌날 광기를 부르며 술과 여색으로 나날을 보낸 사도세자가 제대로 사람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못하면 영조의 손자 이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죄인의 아들이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조는 광기를 부리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이고, 손자인 이산을 보호하기 위해 영조의 죽은 첫 아들 경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손자 이산을 왕위에 오르게 한것이다. (정조 대왕)
그리고 이산(정조)은 왕이되어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함한 노론과 ,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적에, 뒤주를 지키면서 뒤주에 오줌을 싸고 희롱을 한 훈련대장 구선복은 이산이 왕이 되자 바로 처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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