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범선후손2 친일파 우범선 암살 (후손 우장춘) 자객 고영근이 복수하다, 제2부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이 있은후 일본으로 망명한다.(1896년 1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하였던 자들은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와 대부분 궁핍하게 살았으나 우범선의 예외였다. 그는 일본 외무성으로 부터 감시를 받으며(요시찰 한국인거동,일본역사서) 매달 20엔의 지원금을 받았다. 그돈으로 자유롭게 교토, 도쿄, 고베, 구레 등을 활동하며 일본인 아내까지 얻어 1남 1녀를 두고 아내가 또 임신중이었다. 우범선은 항상 자객에게 암살 당할까봐 주위를 경계하며 2층에 기거하였다. (당시 20엔은,1900년초 당시 소학교 선생의 월급의 2배, 쌀 10kg에 1엔 19전 이었다, 값의 풍속사 中) 우범선이 암살당한 후에도 일본에서는 우범선의 장남의 학비를 되주었고, 조선총독부에서는 차남 학비를 비밀리에.. 나누고 싶은 글 2022. 10. 24. 매국노 우범선 '암호명 여우사냥'(ft 명성황후, 민비, 흥선대원군)제1부 조선시대 우범선이라는 무인이 있었다. 그는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친일파로 유명하기도 한 인물이다. 이 우범선은 '암호명 여우사냥'이라는 엄청난 일을 벌였는데, 오늘은 이 우범선과 그 '여우사냥'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친일파 우범선의 여우사냥 우범선 (1857년 5월 24일 ~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은 조선 충청도 단양군 출신으로 신분은 중인이었다. 무인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우범선 본인도 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별기군을 창설하였는데, 우범선은 이 별기군으로 근무하는 중 일본으로 잠깐 밀항 하였다가 돌아온 일이 있다.(탈영?) 그로 인해 평안북도 순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평양감사 '민병석'의 도움으로 '장위영.. 나누고 싶은 글 2022. 10. 23.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