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동 전두환의 대한 충성심 (ft.5공화국 장세동, 고향, 나이, 근황)
전두환 하면 장세동, 장세동 하면 전두환,
역사의 인물인 두 사람 관계에대해
포스팅 해보려합니다.
장세동 (長世東)
출생 = 1936년 9월 27일 (86세)
고향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 용정리 상유마을
(인동장씨의 집성촌)
본관 = 인동장씨
호 = 남촌
부모 = 아버지 (장성국), 어머니 (한대방)
형제 자매
형(장세태), 남동생 (장세용)
누이 (5명), 3남 5녀중 차남
배우자 = 지경자
자녀 = 2남
학력
서울창신국민학교→서울돈암국민학교(졸업)
성동공업고등학교 (졸업)
육군공병학교(졸업)
육군기갑학교(졸업)
육군포병학교(졸업)
육군보명학교(졸업)
육군대학(졸업)
경력
수도경비 사령부 30경비단장
제 3공수특전여단장
제 5대 대통령 경호실장
네 13데 국가안전 기획부장
임관 = 육군사관학교 (16기)
복무 = 대한미국 육군(1960년 ~ 1984년)
최종계급 =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보직 = 대통령경호실장 (제 5공화국)
참전 = 베트남 전쟁
종교 = 개신교
장세동
전라남도 고흥에서 아버지 장성국 어머니 한대방의 슬하의 3남 5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세동이 4살 되던해에 아버지가 있던 경성부(서울)부로 가족전체가 이사하여 신설정(신설동)에 정착하였다가, 8.15 해방후 아버지(장성국)가 서울 성북경찰서 순경으로 잠시근무하였다.
아버지(장성국)은 순경을 그만두고 대한토건협회에서 근무하며 장세동은 어린시절 집안 형편은 그런데로 괜찮았다고 한다.
장세동은 학창시절 엔지니어가 되려고 성동중학교 기계과에 진학하였는데, 중학교 2학년 1950 6.25 전쟁이 터졌다.
6.25가 터지기 하루전 아버지(장성국)이 수술을 하여, 가족모두는 피난을 가지못하였고, 그해 8월말경 아버지(장성국)이 식량을 구하러 나갔는데 그길로 행방불명 되었고, 9.28 서울 수복이 되기까지 인문군 치하에서 지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후 장세동은 성동공업고등학교로 복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중학교 과정을 다 이수하지 못해, 중학교 과정까지 이수하느랴 고등학교를 7년만에 졸업하였다.
장세동은 학창시절 성적이 뛰어났으며, 특히 수학에 재능이 뛰어나 학교 선생님은 장세동이 공과대학 건축과에 진학할것을 권유하였으나, 6.25를 겪으면서 어려워진 가정형편에 1956년에 30:1의 경쟁률을 뚫고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였다.
장세동 베트남 전쟁 참전과 전두환의 인연
장세동은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졸업을하고, 졸업과 동시에, 임관된후 바로 PK TK 경상도 출신인 군인들이 주측인 '하나회'에 가입한다.
호남 출신인 장세동이 경상출신으로 이루어진 '하나회'에 가입한것을 보고 주위에서는 '난놈'이라고 칭하였다.
장세동은 보병사단 소대장을 거쳐, 대위 진급후 제 1공수특전단에 팀장(중대장)복무하던중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된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장세동은 베트콩으로 부터 어깨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도, 부상을 견디며 전투를 계속하는 투지를 보여, 부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며, 결국 베트콩 43명을 사살하고 베트콩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린것이다.
장세동은 베트남 참전후 1967년 육군 수도 보병사단 30경비대대 작전 장교가 되었고, 이후 군 감찰관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게 되므로 장세동은 월남파병을 두번을 간것이다.
베트남 두번째 파병중 전두환을 만나게 되어, 장세동은 전두환으로 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두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어, 귀국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할때 장세동은 전두환의 밑에서 장교로 근무하면서 전두환의 심복이 된것이다.
장세동과 전두환의 12. 12사태
장세동은 박정히 대통령이 서거하고, 수도경비사령부 제 30경비단장으로 직속상관인 장태완 소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 내 불법 사 조직인 '하나회'의 수장인 전두환을 따라 12. 12 군사반란에 가담하게 되면서 인생길의 갈림길에 서게된다.
장세동은 직속 상관인 장태완을 체포하므로, 이 공로로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 특전여단장을 맡게된다.
이후 전두환의 제 5공화국이 출범하고, 장세동은 전두환 대통령으로 부터 청화대 입성을 권유받지만, 장세동은 육군참모총장이 꿈이었던 장세동은 "군내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보좌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서 청화대 입성을 거절한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여름, 장세동을 불러 다시한번더 청화대 입성을 권유하자, 장세동은 전두환 대통령 뜻을 받을어, 현역 군인 신분을 유지한채,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다.
[1981년 7월 장세동은 준장인 군인신분을 유지하면서 대통령 경호실장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장세동 대통령 경호실장 임명 수여식 일화
장세동 경호실장 임명 수여식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장세동에게 임명 내용을 낭독하라고 한뒤, 선서는 장세동이 아닌 전두환 대통령이 선서를 하였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는 경호실장이니 경호실장으로 부터 임명 내용 낭독을 듣고, 선서는 직접 하고싶다"라고 한것이다.
장세동은 "개인으로서는 별로 원하지 않은 자리였으나, 각하께서 해라면 해야지, 어쩔수 없었다"라고 회고 하였다.
장세동을 경호실장으로 임명한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비서실 보좌간 '허화평'과 사정수석비서관 '허삼수'를 견제하기 위한것이었다고 한다.
장세동은 전두환을 향한 충성심과 심기경호는 장세동이 경호실장이 된 후로, "대통령이 마음이 편해야 국정도 잘 되니 심기까지도 경호를 해야 한다" 며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다.
또한 장세동 경호실장은,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이 국사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가령 부부 싸움을 하고 출근한 회사원이 업무에 짜증을 부리면 회사일에 나쁜 영향을 주게된다.
심기가 불편한 상태에서 내린 대통령의 잘못된 결단이 국가에 미치는 무형적인 손실은 엄청날수있다.
경호실은 대통령의 신변안전을 넘어 대통령의 국정을 편안한 상태에서, 기분좋게 판단할수 있도록 해야한다."라고,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훈시하였 다고한다.
그 뿐만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이 산책중 돌부리가 티어 나온것에 넘어질수있으니, 산책하는 길을 평평하게 하였고, 전두환 대통령이 행사차 지방을 방문을 하였을때, 전두환 대통령이 머무는 공간에 국화꽃이 만연해 있었는데, 장세동은 그 국화꽃을 보고, 국화꽃을 다 치우라고 하였다.
그 이유인 즉슨, 장세동은 국화때문에 아웅산 사건이 연상 되었고 장례식과 같은 분위기 같아보여서 국화꽃을 다 치우라고 하였던 것이었다.
장세동은 언제나 전두환이 찾으면 5분이내에 갈수있는 인접한곳에 항상 대기하여 있었고, 전두환 대통령을 보기전에 옷 매무시와 머리를 정갈하게하 고, 향수도 전두환 대통령이 쓰는 똑같은 향수를 사용하였으며, 항상 전두환 대통령을 말을 기록하기위해 메모지와 지도를 항상 소지하였다고 한다.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임명
1985년 민주화 요구가 거세진 그때, 검찰과 사법부도 벌벌떨게 만들던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장세동이 임명된다. 국가 안전기획부부장 자리의 위상은 그 정권의 가장 신뢰받는 자리로 장세동은 남산의 대통령으로 불리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는 온갖 비난을 받고,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인 장세동은 6월 민주화 항쟁의 물결속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것을 "죽은 종철이 산 세동을 쫒아냈다"라는 말이돌기도 했었다.
제 5공화국 막을 내리다.
1988년 제 6공화국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하나회' 내부 파벌중 전두환계인 박히도 최세창등이 줄줄이 숙청되면서, 전 정권의 경호실장과 안기부부장을 지낸 장세동은 현 정권에 눈에 가시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장세동은 5공 비리 청문회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전두환 대통령의 충심은 하나도 변하지가 않아, 장세동은 "모든게 본인의 책임 지시"라고 말하며, "자신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는 한이 있더라도 각하의 구속은 막겠다"라는 명언을 남기도 하였다.
청문회에 첨석한 국회의원들은 장세동에게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했다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매달릴 정도였다고 한다.
장세동은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봐준 사람에게는 모든걸 바친다"라고 하였으며, 1993년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으로, 전두환 대신 장세동이 뒤집어쓰고 감옥에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정권이 바뀌어 사면 복권되어 전두환 대통령을 찾아가 "각하 휴가 다녀왔습니다"라고 전두환 에게 거수경례를 하였다고 한다.
장세동은 '의리의 사나이' '의리의 돌쇠'라고 칭하기도 한다.
노태우의 심복은,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미국으로 바로 도망을 갔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인복도 많고, 전두환 대통령의 리더쉽이 매우 뛰어났으며, 그에 감회되어 측근들이 전두환 대통령 곁에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장세동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면이있다. 장세동에 대해 비판도 하지만 신 군부중 최고의 충신은 장세동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장세동은 현재 86세로 최근 근황은 공개된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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