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는 중국에서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소재이면서,
중국 유일 여황제의 오른 중국의 3대 악녀로 곱히기도 한 측천무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측천무후
출생 = 624년 2월 17일
고향 = 당 이주 (현, 쓰촨성 광위안시)
사망 = 705년 12월 16일 (향년 81세)
능묘 = 건릉
성씨 = 무
휘 = 조
< 무조>
아명 = 미랑
키 = 167cm (중국 역사서)
부모 = 아버지(무사확), 어머니(양씨)
형제 자매 = 2남 3녀중 2녀
배우자 = 태종, 고종 (고종은 태종의 아들)
존호 = 천책금융성신황제
재위기간
당의 황후 = 655년 10월 13일 ~ 683년 12월 27일
당의 황태후 = 683년 12월 27일 ~ 690년 10월 16일
당의 태상황 = 705년 2월 22일 ~ 705년 12월 16일
무조 (측천무후)
무조(측천무후)는 현재의 쓰촨성 광위안시에서 목재상을 하는 아버지 '무사확' 어머이 '양씨'사이에서 태어났다.
무조의 아버지 '무사확'은 대 토목공사로 거부가 되었고, 620년에 본처(상리씨)가 사망하고 '양씨'와 다시 혼인하여 세딸을 낳았고, 그중에 둘째 딸이 무조(측천무후)이다.
무조(측천무후)의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시대의 재상을 지낸 '양달'의 딸로 명문가 출신이다.
무조의 아버지 무사확의 본처(상리씨) 사이에는 아들 '무원경'과 '무원상'있다.
'무원경'과 '무원상'은 무조(측천무후)의 이복형제 이다.
무조(측천무후) 후궁으로 입궁하다
당나라 2대황제 태종 이제민의 황후(문덕순성황후, 황태자 '이치'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전국에서 많은 후궁을 모집하게되며, 무조의 미모가 빼어난것을 알고 12살에 후궁으로 입궁하라는 조서를 받고 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이때 당나라 황제 태종 이세민은 39살이고, 후궁으로 뽑힌 무조(측천무후)는 12살로, 27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것이다.
.
무조(측천무후)가 후궁으로 입궁하여 받은 품계는 낮은 정 5품 '재인'이었고, 그 품계는 무조(측천무후)의 가문이 변변치 않아, 아래에서 4번째 가는 후궁 품계를 받은 것이다.
무조(측천무궁)은 입궁하여 크게 황제 당 태종 이제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으나, 황제 태종은 무조(측천무후)를 무미라는 칭호를 내렸고, 당 태종 이제민은 '무미랑' (무씨성의 예쁜이)이라고 불렀다.
황제 태종 이제민은 궁에 새로운 말이 들어왔는데, 그 말이 원낙 사나워서 대장군이었던 을지경덕이 몇번이고 말에서 떨어지자, 황제 태종 이제민은 "성질이 사나운 말을 길들일수 있겠느냐"며 대신들에게 묻자 무조(측천무후)가 나서서 "제가 저 말을 길들여 보겠습니다" 라고 하자, 황제 태종은 어떤 방법이냐고 묻자,
무조(측천무후)은
"철편으로 때려서 기를 죽인다.
그렇게 해서 안되면 철주로 후려친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찌른다." 라고 대답하자,
황제 태종은 "그러다가 말이 죽을텐데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죽이는것은 지나치지 않느냐"라는 당 태종의 말에,
무조(측천무후)는
"폐하의 장수들은 모두 폐하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충신들입니다"
"말이 멋대로 날뛰면서 대장군을 다치게 하였는데 어찌 말 한마리를 아끼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당 황제 태종 이제민은 무조(측천무후)의 기개를 존중하여 상은 내렸지만 총애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때 무조(측천무후)는 시, 서예등 여러 학문을 열심히 익혔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 비구니가 되다.
당 황제 태종 이제민은 병환이 들어 '무조'가 병간호를 하던중, 아버지 병문안을 온 황태자 '이치'를 그곳에서 보고 서로 반하게 된다.
(당 태종 이제민의 죽은 황후의 아들(이치)과 새 어머니 (무조)의 불륜)
그때 무조(측천무후)의 나이는 22세, 황태자 '이치'의 나이는 18세로, 두사람은 은밀한 사랑을 나누던 시기에, 황태자 '이치'의 아버지 당나라 2대 황제 태종 이제민이 사망하게 된다(649년 7월)
황제 태종이 사망하자, 황태자 '이치'는 형을 체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며,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이 된것이다.
무조(측천무후)는 당 황제 태종 이제민이 사망하자, 태종의 후궁으로, 후사를 두지 못하여 장안의 감업사(절)에서 법명 '천초'라는 비구니가 되게된다.
(그 당시 당나라는 황제의 후궁이 후사를 두지 못하면, 자신이 모시든 황제가 사망하게 되면 법에 따라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는 것이다)
무조(측천무후)와 당나라 황제가 된 '이치' 고종과는 그렇게 이별하여 감업사 비구니가 되었고, 무조(측천무후)는 고종 '이치'를 잊지못해 이런 시를 짖는다.
여의낭
- 비구니로 몰골은 초라한데
시간이 갈수록 그리움은 쌓이네
상자를 열어 석류처럼 붉은 치마를 보시면
눈물 얼룩이 보이련만.-
그런더 차에 태종이 죽은이 일년이 되어 고종 '이치'는 감업사에서 아버지 태종의 제사를 지내러 가게되어, 고종 '이치'는 감업사에서 비구니 생활을 하고있은 무조(측천무후)를 보고 다시 사랑에 빠지게되며, 이후 무조를 만나러 감업사에 드나들다 무조(측천무후)가 임신을 하게된다.
무조(측천무후) 궁에 다시 들어오다.
고종 '이치'는 아버지 태종의 후궁이었던, 임신한 무조(측천무후)를 궁에 데려오지 못해, 고민하던차에, 황후(측천황후 왕씨)가 먼저 무조(측천무후)를 후궁으로 맞아, 궁에 들이는것을 제안하여 무조가 다시 궁으로 입궁하게된다.
고종 '이치'의 황후 왕씨는, 고종 '이치'의 후궁인 '소숙비'를 견제하기 위한것이었다.
고종 이치의 후궁 '소숙비'는, 미모도 출중했지만 언변또한 뛰어나으며, 고종 '이치'와의 사이에서 아들 한명과 딸 두명을 두고 고종 '이치'의 총애를 듬북 받고있었던 것이었다.
무조(측천무후)는 황후 왕씨의 덕분으로 궁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황후 왕씨의 갖은 비위를 마추며 지극히 공손하게 황후 왕씨를 대하며 복종하였다.
황후 왕씨는 이런 무조(측천무후)를 황제 고종에게 무존건 칭찬하며 편을 들어, 무조(측천무후)는 황후 소숙비 다음가는 지위의 '소의'(무 소의)에 봉해졌다.
무조(측천무후)의 계략
652년 무조(측천무후)는 고종 '이치'의 아들(이홍)을 출산하였으며,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키후, 황후 왕씨의 일족의 반대파 권력과 궁인을 매수하여, 황후 왕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받는다.
무조(측천무후)는 2년후인 654년에 딸 안정공주를 출산하고, 황후 왕씨가 안정공주를 보러온것을, 황후 왕씨가 가고난후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의 어린딸을 이불을 덮어 질식시켜 죽이고, 황후 왕씨가 아이를 죽였다고 덮어씌운 것이었다.
무 소의가 딸을 낳자
황후 왕씨가 찾아와 영아를 보고갔다
황후가 나간 직후 무 소의는
어린 영아를 질식시켜 죽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 中 >
고종 '이치'는 황후 왕씨를 황후 자리에서 폐하였다.(665년 10월 13일)
이렇게 하여 무조(측천무후)는 황후 자리에 오르게 되고, 황후였던 왕씨와 소숙비에게 곤장 100대를 쳐서 빛도 들어오지않는 냉궁에 가두었다가, 이후 두사람을 팔 다리를 잘라버리고 몸뚱이만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이고, 왕씨를 (망, 이무기) 소숙비를 (효, 올빼미)라고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무조(측천무후)의 이런 행동에 '소숙비'는,
"나는 고양이로 다시 태어나, 쥐로 태어난 너를 물어 죽일것이다"라며 악담을 퍼 부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조(측천무후)는 자신이 살아생전 궁에서 절대 고양이를 못 키우게 하였다.
측천무후 여황제가 되다.
무소의(측천무후)는 남편인 고종 '이치'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 무기를 자결하도록 강요하고, 황태자 '이충'(고종의 첫 아들)을 여러죄를 덮어씌워 폐위 시켜 검주로 귀향을 보냈는데, '이충'은 스스로 자결하고만다.
측천무후는 자신이 낳은 첫째 아들 '이홍'을 황태자로 앉히게 된다.
당 고종 '이치'가 병환이 들자 자신의 아들 황태자 '이홍'이 황제의 자리를 물려 주려 했으마, 황태자 '이홍'도 얼마못가 아버지 고종 '이치'와 어머니(측천무후)와 함께 밥을 먹다가 경련을 일으키며 죽고만다.
아들 '이홍'이 죽고, 둘째 아들 '이현'이 황태자 자리를 물려받고, 683년 당 고종 '이치'가 사망하고, 자신의 아들 '이현'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당나라 4대 황제 중종이다.
중종 '이현'이 황제가 된후 얼마 안되어 중종 '이현'의 아내 황후 위씨의 아버지(위현정)가 국정을 농단했다며, 측천무후는 황제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 시켜버리고, 자신의 막내아들 '이단'을 황제를 앉혀버린다.(당나라 제5대황제 예종)
황제가 된 '이단' 예종은 유약하였으며, 측천무후는 이때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게된다.
예종이 아버지 고종의 후궁이었던 '소숙비'의 두 딸이, 나이가 넘도록 시집을 못가고 냉궁에서 고생하고 있는것을 알게되어 예종이 안타깝게 생각하여 어머니 측천무후에게 '소숙비'의 두 딸을 선처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일언제하 거절하고, 그런 예종을 나약하다며, 크게 나무라기 까지한다.
측천무후은 낙양을 '신도'라고 고치고 모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으며,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사람들은 모두 처형 숙청 귀향을 보내버리고 내각 개편을 새로이 한다.
측천무후는 690년 국호를 '당나라'에서 '주'나라(고대 주나라는 왕족)로 고친며, 그녀의 성씨를 따서 '무주'라고 불렀다.
측천무후는 신분이나 지휘관계없이 실력있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여 정사를 보살피기 시작한다.
측천무후는 인재 선발에 힘썼다
등용의 문을 활짝열어
기탄없이 인재를 등용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인재를 찾았다.
관직에 맞니 않게 무능한 자가있으며
모두 찾아내어 관직을 삭탈하고
대신 그자리에는 현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자를 임명하였다.
< 신당서 中 >
이런 측천무후의 노력에 백성은 살기가 좋아져, 농업 상업 수공업 교통까지 모든게 낳아지며 발달하였으며, 측천무후는 더이상 공포정치를 끝내고, 억울한 백성들을 복권시켜 주며 백성들의 마음까지 얻게된다.
(측천무후가 나라를 다슬릴때 '당'나라('주'나라) 백성들은 가장 살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 점에서 측천무후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다)
측천무후 불로장생 (젊은남자를 취하다)
측천무후는 젊은남자와 성 생활을 하면 병에 걸리지 않고 젊음을 얻을수있다는 '도교'의 '양생술'에 따라 '공학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젊고 잘생긴 남자를 모집하였다. (측천무후의 수발을 드는 남자들을 남총이라고 불렀다)
이 남총들은 측천무후 곁에있으며, 침실 수발까지 들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말년에 여러 남총들 중에 장씨 형제'에 빠져 "나는 장씨 형제 덕분에 많이 젊어졌다"라며, 나라 정사를 남총인 장씨 형제에게 맡기며, 자신이 마음에 드는 남총들에게는 벼슬까지 내려준다.
(측천무후는 남총이 무려 3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장씨 형제는 측천무후를 등에업고, 나라의 정사를 자지우지 하는 바램에, 쿠테타(신룡정변, 705년 말)가 발생하게 된다.
쿠테타의 명분은 황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라며, 늙은(81세) 측천무후 처소를 찾아가 다그치게 된다.
측천무후는 이미 자신은 너무 늙었다며, 셋째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되며, 황제가 된 아들은 다시 국호를 '당'나라로 정한다.
측천무후 유언
측천무후는 죽기전 유언을 남기는데
"나를 황제라 부르지 말고, 측천대성황후라 칭하며,
왕 황후, 소숙비 두 집안과 화를 입은 사람들의 성씨와 관직을 복권하라".
"자신의 비석에는 아무글자도 세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또 측천무후는 "나는 이나라의 황제 이니라"라고도 했다고 한다.
▶측천무후의 잔인한 면과, 정치를 잘했다는 평가로 엇갈리고 있다.
◈영화 무미랑 전기(측천무후)는 팡빙빙이 직접투자하고 주인공도 맡았다.
522억원이라는 투자금과 주연급 여배우들의 의복만도 260여벌이었다고 한다.
출연진은 판빙빙을 비롯, 대만의 장균녕과 장정, 주해미, 장풍 신삼국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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