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이 있은후 일본으로 망명한다.(1896년 1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하였던 자들은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와 대부분 궁핍하게 살았으나 우범선의 예외였다.
그는 일본 외무성으로 부터 감시를 받으며(요시찰 한국인거동,일본역사서) 매달 20엔의 지원금을 받았다. 그돈으로 자유롭게 교토, 도쿄, 고베, 구레 등을 활동하며 일본인 아내까지 얻어 1남 1녀를 두고 아내가 또 임신중이었다.
우범선은 항상 자객에게 암살 당할까봐 주위를 경계하며 2층에 기거하였다.
(당시 20엔은,1900년초 당시 소학교 선생의 월급의 2배, 쌀 10kg에 1엔 19전 이었다, 값의 풍속사 中)
우범선이 암살당한 후에도 일본에서는 우범선의 장남의 학비를 되주었고, 조선총독부에서는 차남 학비를 비밀리에 보내주었다. 우범선은 조선에서는 국모을 시해한 도망자 였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처럼 당당했다.
(이것을 봐도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일본에게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고영근
1897년 11월 그때서야 명성황후 국장이 치러지고, 명성황후의 아들 황태자 순종이 목아우는것을 본 병마절도사 고영근은 "황태자 전하께서 밤낮으로 통곡 하시면서 생모의 원수를 누가 토멸해줄 것인가를 한탄하셨는데 나는 오늘에도 그일을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지는것 같이 생각된다"
고영근 은 일본에 도착한다.(1899년 여름)
고영근은 고베, 오사카, 구마모토, 등을 떠돌다 오사카의 독립운동가 윤유정의 집에 머물다, 윤유정에게 우범선을 압록강으로 유인해 암살할 계획을 듣게되고, 고영근은 혼자서 히로시마현 구레에 살고있는 우범선을 찾아간다.
고영근은 뛰어난 언변으로 우범선의 경계심을 풀었고, 구레(일본의 지역명)에 살고싶다면 처자식을 다 데려 올거라고 큰집을 구해 달라고 우범선에게 부탁한다.
우범선, 자객 고영근에 의해 암살당하다
우범선이 구해준 고영근의 집은 우범선 집과 그리 멀지 않았고, 고영근은 그곳에서 우범선의 암살계획을 세운다.
고영근은 자신을 도와줄 새로운 동지 노윤명을 끌어들인다. 노윤명은 자신의 노복이었으며 오까야마에 살고있었다. 노윤명 역시 고영근과 함께 할것을 약속한다.
고영근은 집들이를 하겠다며 우범선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우범선은 고영근과 그동안 지내면서 아무런 일이없자 고영근에 대해 경계심을 풀고 집들이에 응한다.
그렇게 그들은 술잔을 나누는 도중 고영근은 슬며시 일어나 우범선 등뒤로가서 날카로운 칼로 우범선의 목을 수차례 찌르고, 노윤명은 쇠망치로 우범선의 머리를 여려차례 내리친다. 우범선은 그자리에서 사망한다(1903년 11월 24일)
고영근이 황실로 보낸편지
[ 대한의 신하된 몸으로 우범선과 하늘을 같이 할수없어 오늘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원수 갚음을 알립니다]
고영근 경찰에 자수하다
일본 경찰은 조선인이 같은 동족을 살해했다고 일본 각 신문마다 떠들썩 하게 보도하였다.(사건현장 도면까지 그려가며 참상을 전함) 일본은 우범선을 열사사라고 표현하였다.
일본 재판부는 고영근 에게 사형, 노윤명에게는 무기징역이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고영근의 사건은 바로 대한제국 황실에 전해졌으며, 명성황후 집안에서는"우범선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궁중에서는 내밀히 민씨 집안에 모여서 축하연을 열것"(일본 외교문서 中)
일본은 고영근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인해 살인을 저질른게 아니고 고영근의 개인의 일로 살인하였다고 몰아가려했다(그래야만 고영근이 본국으로 소환되지 않기때문) 고영근은 재판부에 "신하에 된몸으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고영근은 하루3번씩 궁에 드나들며 고종과 민왕비에게 문안을 드렸고 고종과 왕비는 고영근을 총애 하였다. 풍운한말비사中]
고종 일본에게 고영근 선처를 부탁한다
고종은 민영수와 민영환을 '하야시 공사'에게 보내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했다. 또 고종은 서울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 에게 고영근의 선처를 직접 부탁한다.(1904년 3월)
◎ 고영근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며, 수감된지 8년만에 석방된다.(1911년)
이후 고종이 승하하자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는 명성황후와 고종황제가 합장 되었다.
(홍릉이 처음에는 청량리에 있었다)
◎ 고종 사후2년 고영근은 홍릉의 능참봉이 되었다.
(명성황후 와 고종의 의 비석에 일제로 하여금 고종을 황제라는 칭호를 비석에 넣지 못하게 하였는데 고영근은 일제몰래 인부를 사서 '고종태황제'를 새겨넣고 왕비의 존호에 글자에도 '태'자를 추가하여 홍릉에 비석을 숨겼다)
아버지 우범선과 아들 우장춘
우장춘은 조선인 아버지(우범선)와 일본인 어머니 에게서 1988년 4월 8일 일본 구레시에서 태어난다.
우범선은 고영근 에게 암살당하고 일본인 아내와 2남 1녀가 남았다. 아들 우장춘(스나가 나가하루)은 일본도쿄제국대학부속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육종학자의 길을 걷게된다.
1935년 우장춘은 일본 국립종사 실험장에서 서로다른 두종을 교배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두종을 탄생시킨다.(종의 탄생)
우장촌의 종(씨앗)의 합성은 다원진화론의 적자 생존의길을 수집하는 파격적인 내용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논문말미에는 그동안 써왔던 '스나가 나가하루' 일본이름 대신 '나가하루 우' 라고 한국성을 사용한다.
우장춘 한국농업발전에 기여하다
우장춘은 조선에서 화젯거리가 되었고, 해방이후 식량난에 직면한 대한민국은 우장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장춘은 "여생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며 조국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라며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여, 전국 농민들에게 새로운 농법과 종자홍보, 우리나라 토양에 맞는 나락(벼) 등을 8년동안 이뤄낸것이다.
우장춘 박사의 훈장
긴장된 한, 일 관계속에 아버지 우범선의 과오는 우장춘 박사가 죽는 그날까지 따라다녔고, 우장춘 박사가 숨을 거두기 직전 '대한민국문화포장'을 수여받았으며, 병상에서 훈장을 받은 우장춘 박사는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다"며 오열 하였다고 전해진다.
씨없는수박
씨없는 수박의 개발자는 일본 교토대학교 '기하라 히토시도' 박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씨없는 수박 개발자가 우장춘 박사라고 알고있는데, 씨없는 수박 개발자는우장춘 박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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