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우범선이라는 무인이 있었다.
그는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친일파로 유명하기도 한 인물이다.
이 우범선은 '암호명 여우사냥'이라는 엄청난 일을 벌였는데,
오늘은 이 우범선과 그 '여우사냥'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친일파 우범선의 여우사냥
우범선
(1857년 5월 24일 ~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은 조선 충청도 단양군 출신으로 신분은 중인이었다. 무인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우범선 본인도 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별기군을 창설하였는데, 우범선은 이 별기군으로 근무하는 중 일본으로 잠깐 밀항 하였다가 돌아온 일이 있다.(탈영?) 그로 인해 평안북도 순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평양감사 '민병석'의 도움으로 '장위영'(왕 호위와 궁궐방어및 도성방어)의 영감이된 인물이다.
민병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중인출신이던 우범선은 상관인 사대부 출씬인 민씨세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일본군이 훈련대를 창설하자 우범선은 훈련대 제 2대대장으로 발탁된며, 개화된 일본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급진 개화파 일원이 된다.
미우라 공사, 흥선대원군과 우범선 포섭
그당시 외교노선은 명성황후가 잡고있었다 민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막으려 했고(인아거일) 일제의 눈에는 명성황후가 눈에 가시였다.
미우라 공사관은 흥선 대원군을 여러차례 방문하여 그를 포섭한다. 그당시 흥선대원군은 순종의 섭정을 거두고 순종이 친정에 들어가므로서 민씨세력(명성황후 친가)이 권력을 잡아 대원군은 거의 유배생활이나 다름없이 지냈다.
1895년 미우라 공사는 민씨세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우범선이 최적의 포섭 대상 이었으므로 민비 암살에 끌어 들인다.
그해 10월 3일에 주한 일본공사관에서 우범선과 미우라는 만남을 가진다. 우범선은 "나는 무인이요, 특별한 정견은 없으나, 즉각 민비 일당을 소탕하지 않으며 어떠한 뛰어난 계책이 있을지라도 조선은 변하기 어렵소" (우범선이시해에 가담하겠다는 말)
암호명 여우사냥
그리하여 일본은 흥선대원군과 우범선을 앞세어 꾸민일이 '암호명 여우사냥', 다른 말로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1895년(을미7년) 10월 8일, 그날 새벽 4시 30분 우범선은 흥선대원군을 태운 가마을 호위하며 경복궁에 들어선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강령전에 대기하고, 새벽 5시 30분 일본 낭인들이 경복군 담을 넘어 들어왔다. 궁궐 수비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낭인을 엄호하여 우범선과 병사들이 광화문 안으로 반쯤 들어 갔을때, 뜻밖에 '홍계훈'이 병사 몇명을 데리고 갑작스럽게 달려왔다, 우범선은 연유를 묻지않고 즉시 명령하여 그자리에서 홍계훈을 죽였다.
(홍계훈은 임호군란때 민비를 업고 피신, 그 공으로 1894년에 장위영 영관를 지냄)
궁궐에 침입한 자객들은 경복궁 북쪽끝에 있는 건청궁 까지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처들어갔다. 왕비의 얼굴을 모르는 자객들은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죽였고, 왕비의 소재를 물어 옥호루 왕비의 침실에 들어왔다. 조선의 왕비는 도피도 방어도 하지 못한채 사무라이 '도 카츠야키' 칼에 맞아 사망한다.
(훗날 민비시해에 가담했던 일본군은 그날의 일은 너무 쉬웠다고 토로했다)
우범선은 자객들이 건청궁에 잠입하자 군대를 풀어 담을 애워싸고 망을봤다. 우범선은 왕비가 살해된 현장에 불려가 일본 낭인들 앞에서 죽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조선훈련대대장 우범선 관여)
명성황후(민비) 불태워지다!
미우라 공사는 궁으로 들어와 명성황후 죽음을 확인한후 '오기하라' 에게 증거인멸을 위해 급히 시체를 불태우라고 명령한다. '오기하라'는 낭인들에게 '먼저 장작을 운반하여 쌓아 더미를 만들어 시체를 그위에 놓고 석유를 뿌린후 불을 지르라고 명령 한다.
(우범선 최후사中)
"숲처럼 많은 민씨족속, 수백명의 시녀, 신하라며 그녀를 국모라고 부르던 이천만 백성, 그들은 지금 어디있을까, 한숨에 목숨이 끊어질때 오직 한사람 나 우범선만이 보았네"
(우범선 최후사 中)
그렇게 민비의 시신은 건청궁 옥호루 뒷산 동쪽꿑 솔밭에서 불태워졌다. 불태워진 민비의 유해를 우범선이 윤석우(조선 훈련대 제1대대 참위)에게 지시해 불태워진 곳에서 조금 떨어진 땅속에 묻었다.
흥선 대원군에 의한 쿠테다
민비시해 다음날 한성신보는 지난밤 참극을 대대적으로 실었다. "대원군 전하께서 입궐하시다"(1895년 10월 9일 한성신보)
모든신문은 일본을 빼고 대원군이 궁에 입궐한 사실만을 강조했고, 조선인들의 내분으로 몰아갔다.("왕궁 안에서 작은 싸움이 있었다")
[일본군은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의 갈등으로 몰아가려 했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 조선인
[ 훈련대 제2대대장우범선]
[ 제1대대장이두황]
[장박, 유길준, 이진호, 황철 ] 이들은 모두 일본으로 도망쳤다.
일본인
[시바시로, 민비 시해당시 일본의차관, 하바드대학출신]
[히라야마 이와이코, 동경제대출신]
[고바야카와 히데오, 일본차관]
[아다치 겐조, 행동대장, 훗날 일본장관임명]
(일본인은 이들을 모두 사무라이 낭인(깡패)들이라고 거짓말 하였다, 민비 시해에 참여했던 일본공사관 직원들은 훗날 일본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일본 정부가 민비시해에 깊이 개입 되어 있었다)
명성황후(민비)를 벤 칼
칼날의 길이는 90cm
일본 쿠시다신사에 100년전 기증받은 칼이다.
일본 애도시대에 유명한 장인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무로 된 칼집엔(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 라고 명성황후를 시해후 그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칼집에 글을 새겨 넣었다.그는 후쿠오카 출신인 도 카츠아키 "자신은 이칼로 조선의 왕비를 베었다" 라고 증언하며, 일본 역사서에 기록 되었다.
히로시마 형무소
일본은 명성황후 죽음을 조선의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갈등으로 몰고 가려 했으나 미국, 러시아등 외국에서 비난여론이 들끓자, 그때서야 일본은 사건 관계자 전원을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하고, 군인 8명은 군법회의에 회부한다.
(살인 혐으로 수감된 사람든 모두 48명, 일본낭인들, 기자, 외무성순사, 저술가, 교원 등 직업이 다양했다)
자객 고영근 그리고 복수 ☞ 제2부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후 어떻게 되었을까?]
2022.10.24 - [나누고 싶은 글] - 우범선 암살 (후손 우장춘) 자객 고영근 복수하다,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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