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후궁인 의빈성씨(성덕임)의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덕임
본관은 창녕이고 이름은 덕임이다.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증 찬성 성윤우이고
어머니는 통덕랑(정 5품) 임종수의 딸인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이다.
성덕임의 아버지 성윤우는 집안이 가난하고 변변치 못해
정조의 외 조부이자 혜궁궁 홍씨의 친정인
영풍 부원군 홍봉환의 집에서 청지기를 지냈다.
성덕임은 정조의 외갓집인 홍봉환의 집에 있을때 부터
영특하고 행동거지가 조신하였다고 한다.
성덕임과 이산의 첫 만남
성덕임과 이산(정조)의 첫 만남은
이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뒤
혜경궁 홍씨와 이산은 죄인의 자식이라하여
궁궐에서 쫒겨나 혜경궁 홍씨의 친정으로 간것이다.
[그러니까 이산의 외갓집인 것이다.]
그곳에서 성덕임과 이산의 첫 대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이후
이산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다시 궁궐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궁궐로 돌아온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친정집에 있는 성덕임을 궁궐로 불러들여
본방나인으로 곁에 두고 길렀다고 한다.
그러면서 경희궁에서 거처하던 이산(세자)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보러 올때마다
성덕임을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고
이산(세자)는 성덕임을 짝사랑 하게 된것이다.
그리고 이산은 15살 되던해에
14살인 성덕임에게 조용히 프로프즈를 한다.
이산은 성덕임을 향하여
"용모가 깨끗하고 단정하여
성품은 단아하고 장중하며
인자하고 온하하고 부드러웠다"<어제의빈묘지명 中>
그러나 성덕임은 명을 따를수 없다며
이산(세자)의 후궁 제의를 거절한다.
그 이유는 이산(세자)에게는 결혼을 한
세손빈이 있었고 세손빈이 아직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덕임은 세손빈을 배려하였던 것이다]
성덕임, 왕이된 정조(이산)의 후궁 거절
이산은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한뒤
1776년 4월 27일 이산(세자)의 나이 23세에
조선 제 22대 임금(정조)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 옆에서 시중을 들고있던 성덕임은
행동뿐만 아니라 글 바느질등 못하는게 없었다고 한다.
특히 성덕임은 글을 잘써 필사에도 참여 하였으며
그것이 '곽장양문록'이란 고전 소설이다.
[곽장양문록은, 연대미상의 고전소설로 중국 당나라 덕종과 헌종의 시대를 배경으로 장씨와 곽씨의 두 가문의 이야기를 담은것, 이 '곽장양문록'은 총 10권으로 이루어졌고, 필사에는 성덕임은 물론 이산(정조)의 두 여동생(공주)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정조(이산)은 왕이된후에
여자에게는 별관심이 없고 나랏일에 몰두하였으며
효의왕후와 사이에서도 아이가 없었다
그러자 왕실 어른들이 정조에게 후궁 볼것을 다그쳐고
정조는 못이겨 후궁을 맞이하는데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를 간택을 통해 맞이한다.
그러나 원빈 홍씨는 궁에들어와 얼마 되지않아 사망하였고
화빈 윤씨는 성격이 포악하여 정조가 마음을 주지않았으며
또한 화빈 윤씨는 거짓 임신으로 소란을 피우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그동안 마음에 품고있던 성덕임에게
자신의 후궁이 되어달라고 다시한번 프로포즈를 하게 되나
성덕임은 또 다시 거절한다.
정조는 후궁이 되어달라는 성덕임이 거절하자
"15년뒤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또다시 고사하였다"<어제의빈묘지명 中>
그때가 정조의 나이 30살 성덕임은 29살이었다.
정조의 후궁이 된 성덕임
정조는 성덕임이 자신이 후궁될것을 거절하자
그기에 앙심(?)을 품고
성덕임의 허드렛일을 봐주는 하인을 불러
가벼운 벌을 내리는 전략을 썼던 것이다.
그러자 이 모든게 사실이 궁궐에 알려지고
성덕임은 어쩔수 없이 정조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후궁이 된다
정조의 후궁이 된 성덕임은
정조가 31살때 아들을 낳게 된다.
정조는 성덕임이 낳은 아이를 '이순'이라고 짓고는
성덕임을 정5품 상궁에서
정3품 소용으로
또 5개월만에 의빈으로 봉했다.(의빈 성씨)
[정조는 직접 의빈이라 지었으며, 의는 화목하며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한다.]
정조와 성덕임은 너무나 금술이 좋았고
정조는 종사를 마친후에는 남은 시간은 성덕임과 보냈다고 한다.
의빈 성씨(성덕임) 또한 정조의 첫 아들을 낳았지만
교만하지않고 겸손하며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윗전을 잘 모셨다고 실록에 전해진다.
정조와 의빈 성씨의 첫 아들 이순(문효세자)의 죽음
정조의 첫아들 '이순'은 태어난지 100일 만에
문효세자로 정하고 성대하게 세자 책봉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의빈 성씨(성덕임)은 1784년 옹주를 낳았는데
그 또한 정조가 너무나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옹주가 태어난지 얼마안가 갑자기 사망하였고,
2년뒤 의빈 성씨는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으나
임신이 5개월이 된던 1786년 5월에
아들 문효세자가 5살 되던해에 홍역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해 조선에는 홍역이 창궐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아들 문효세자를 잃고
"나는 처음에는 의심하다 도중에는 밑게 되었으니
끝내 또 아득하여 꿈 인듯 참이 아닌듯 하였다" <어제의빈묘지명 中>
의빈 성씨는 아들 문효세자가 죽고난후
눈물을 한방울도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의빈 성씨는
"몸은 제것이 아닙니다
만약 정에 끌려 방자하게 마음대로 슬퍼하며
제가 스스로 돌보지 않는다며 나라에 죄를 짓는 겁니다" <어제의빈묘지명>
의빈 성씨는 자신이 임신 중이었기에
다음 후사를 생각해서 마음을 추스리려고 애를 썼다는 것이다.
정조는 사랑하는 아들 문효세자를 궁궐가까이 두고싶어서
현재 서울 용산구인 효창공원 자리에 묘를 쓰게 된다.
[효창묘 = 효성스럽고 번성하다 라는 뜻]
의빈성씨 (성덕임)의 죽음
의빈 성씨는 아이들의 죽음으로
마음을 추스리기위해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의빈 성씨는 정조에게
"바라건데 정전에 자주자주 나아가서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한다면 곧 경사가 찾아올겁니다.
또 장차 지하에서도 즐겁고 좋아할 겁니다"<어제의빈 묘지명 中>
라고 하였다.
[의빈성씨는 정조가 중전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라고 한것]
그당시 의빈 성씨(성덕임)는 자현증을 앓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조가 직접 약을 달여먹이며
의빈 성씨의 병을 낫게 하려고 보살폈으나
문효세자가 죽은지 4개월후인 1786년 9월 14일 창덕궁에서
의빈 성씨(성덕임)은 사망한다. <조선왕조실록>
[자현증은 임신으로 인하여 몸의 장기가 부담이 가는 증세]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사망
정조는 의빈성씨가 죽자 의빈성씨(성덕임)의 묘를
"문효세자의 묘와 백 보 거리로 빈의 소원을 따른 것이다" <어제의빈묘표 中>
의빈성씨(성덕임)임은 죽으면서 정조에게
아들 문효세자 옆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긴것이다.
정조는 의빈성씨가 죽자 1등의 예로 장례를 치루고자 하였으나
그해 나라에 흉년이 들었으며
얼마전 죽은 아들 문효세자의 장례비용도 많이 들어
의빈 성씨의 장례에는 비용을 절감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문효세자가 묻힌 효창원 왼쪽 산등성이에 의빈성씨의 묘를 정하였으나
일제강점기때 효창공원 일때에 골프장을 조성한다며
효창원과 의빈묘는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
[효창공원에서는 의빈성씨와 문효세자의 묘가 약 50m 정도 떨어졌었는데, 문효세자 묘를 서삼릉으로 이전 이후 어머니인 의빈 성씨묘는 문효세자 묘에서 약 2km도 떨어진 후궁묘 권역에 묻혀있다]
[여기 서삼릉은 왕과 왕비는 물론 여러 왕자와 왕녀는 물론 후궁들의 묘와 태실이 모시진 곳으로,
일제강점기 말부터 해방이된후 여기 저기 흩어져있던 후궁들의 묘를 한곳으로 모아놓은 곳이다.]
어제의빈묘지명
정조는 후궁 의빈성씨(성덕임)의 죽음을 애도하며
함께 지낸날들을 회상하며 '어제의빈묘지명'을 직접 작성하였다.
어제의빈묘지명 中 일부
"너는 멀리 떠났다
너를 데려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영원히 이별하니
내가 어렵고 힘들구나
나는 이제 와서 네가 영원히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의심한다"
"너도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것이다"
정조는 의빈성씨가 죽은후 삼년동안 제삿날 비문을 직접썼다고 한다.
그리고 정조는 의빈성씨(성덕임)이 죽은후 수차례 의빈성씨의
사당과 묘를 수차례 방문하였다가
후궁 수빈박씨가 1790년 아들 이홍(조선 제23대 순조)를 낳고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조는 의빈성씨(성덕임) 죽은지 14년후인
1800년 8월 18일 향년 47세로 갑자기 몇일을 앓다가 사망하였다.
의빈성씨(성덕임) 독살설
의빈성씨(성덕임)의 자녀들의 죽음과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이 <이재난고>에 등장한다.
의빈 성씨보다 삼간택을 통하여 정조의 후궁이된 화빈 윤씨는
무품인 '빈'에 봉해졌다.
화빈은 후궁이 되었음에도 아이를 낳지 못하였고
임금 정조의 마음은 온통 성덕임(의빈 성씨)에게 다 가있었다.
이로인해 후궁 화빈 윤씨는
성덕임이 아들을 낳자
"방중술을 써서 아들을 낳았다'라는 둥
중전 효의황후를 질투하는 사람이 의빈 성씨라는 말을 퍼트리며
성덕임에게 온갖 질투를 부린것이 소문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그로인해 화빈 윤씨가 성덕임을 독살하지 않았나하는 의문이 제기 된것이다.
정조는 의빈성씨(성덕임)가 죽자
화빈윤씨를 내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재난고는 전북 고창 출신의 조선후기 대실학자 이재 황윤석이 열살때부터
죽기 이틀전까지 53년동안 다양한 정보를 기록한 일기이다.
■정조와 의빈성씨(성덕임)의 이야기는 실제 조선 왕실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다.
정조는 성덕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하여 성덕임에게 두번이나 거절을 당하고
20년을 기다려 후궁을 맞이 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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