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인물 열전

안중근 3발의 총성(ft. 손가락, 조마리아, 사형선고일, 후손)

행복한글쓴이 2023. 3. 1. 14:01

 

 

오늘은 3.1절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잡아 삼킨후 35년만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되기전 일본의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에 대해 포스팅 해보려 합니다.

 

 

 

안중근 어린시절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조부(친 할아버지)이신 안인수는 황해도 해주일대에서 미곡상을 운영하여 4백석 토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성품이 탐욕하여 배부름을 모르고 온갖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고,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아 거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안인수를 안억픽(安億煏)이라 불렀었고, 도 내에서도 자산가로 이름이 높아으며, 이로인해 안중근은 어려서 유복하게 자랐다. (안중근의 본관은 순흥 안씨이다)

안중근의사 아버지와동생 정근, 공근

 

안중근의 태어날때 북두칠성(7개의 점)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안응칠(安應七)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안중근은 어릴때 서당공부를 게을리하고 사냥하는것을 좋아했으며, 차분히 앉아있는게 드물어 아버지(안태훈)는 안응칠 이름을 무거울중(重) 뿌리근(根)으로 바꾸어 그때부터 '안중근'으로 불리게 된것이다.

안중근 아버지

 

안중근은 '내나이 예닐곱 ( 6 ~7살)에 조부를 사랑을 많이받아 서당에서 8 ~9년을 한문을 익혔으나 조부(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사냥을 하며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마음속에 있는말을 전하였다.

 

 

 

안중근의 의병참가와 손가락 절단

안중근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906년 3월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여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잘 되지를 안하, 석탄상회를 정리하고 전 재산을 정리하여 '삼흥학교'를 설립하였고, 그뒤 황해도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게된다.

 

 

안중근은 의병에 참여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키기도 하였고,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도 하여, 안중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자신이 새로운 의병을 창설하였으나 곧 해체되었다.

안중근 하얼빈에서 입었던옷 (소련제 군복)

 

그러다 1909년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결의를 다지기위해 안중근은  "우리의 손가락을 잘라 맹새를 하자"라고 제안을 하고 11명 전부다 왼손 네째손가락(약지or 무명지)을 잘라 피로 맹세를 하였다.

손가락 절단
피로썬 글씨(대한독립)

그리고 그 피로 태극기 위해 대한독립이라고 썬다.

 

 

 

 

안중근 이토히로부미 저격하다.

안중근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제국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을 하기위해  1909년 10월 26 에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대동공보사(연해주지방 독릭운동 기구의 구심점)'로 부터 전해 듣게된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은 동지들과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을 맡고, 안중근은 하얼빈 역을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채가역에 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기차에서 러시아군들이 기차안 사람들이 못나오게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애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실패하였고,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역 역사 이층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은 기차가 역사안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채가구역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 히루부미 암살에 실패하였던것을 알게된다.

 

채가구 역

 

 '이토 히로부미'와 러시아 재부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는 기차안에서 회담을 끝내고 10월 26일 오전 09시 30경에 의장대 사열을 위해 기차에서 내려,  의장대 사열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이토 히로부미'를 거리가 약 10발자국 정도 차이나는 지점에서  안중근은  권총(브라우닝제 반자동 권총 M 1900)으로 저격하였다.

하얼빈 역, 기차가들어오기 직전

 

[그때는 지금처럼 얼굴이 잘 알려진 상태가 아니었고, 옷도 모두 비슷한 옷을 입어 이토히로부미가 누구인지 잘 몰랐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갑자기 멈춰서 관중들을 손을 흔드는 바람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라는걸 알아채고 그를 향해 쏭을 쏘았던 것이다.]

 

총을 쏜 안중근을 러시아군들이 덮쳤고, 

안중근 체포

그리고 안중근은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들며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독립), 즉 대한독립 만세이라고 세번을 크게 외쳤다.

 

 

그렇게 총을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기차로 옮겨져, 각성제로 가끔 마시든 브레드를 한모금 마시고서는 "범인은 조선인 인가?"하고 물었으며, 옆에서 그렇다고 하니 "바보 같은 녀석"이라며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1909년 10월 26일오전 10시)

 

[안중근 의사가 쏜 7발의 총알중 3발은 '이토히로부미'가 맞았고, 4발은 주위에 있는사람이 맞았다]

 

 

 

 

 

 

안중근 재판과 사형선고

안중근은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곧 바로 일본 총영사관 넘겨졌고, 우리측에서는 최재형이 나서 '이토 히로부미'의 사건이 하얼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도록 변호인을 준비했지만 일본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관동주  뤼순(료순, 여순)에 수감되었다.

수감된 안중근, 이때 수염과 눈섭까지 일본인이 다 밀었다고 한다

재판관은 왜 '이토'를 죽였냐는 질문에 

안중근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죄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죄

정미 7조약을 억지로 맺게 한죄 

고종을 폐위시킨죄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킨죄

무고한 조선인을 학살 한죄" 15가지를 나열하였다.

 

 

일본제국은 '이토 히로부미' 사건으로 인해 안중근을 파렴치한 살인자로 몰았고, 또한 조선을 완전히 집어 삼킬계획을 세우며,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시켰으며, 일본이 불리하니 재판도중 방청객을 퇴장 시켰고, 재판 6일만에  무려 5차 재판까지 진행하여 마지막 재판날 일본은 안중근에게 최후의 진술을 하라고 한다.

 

안중근의 최후진술은

" '이토'를 죽인건 자객으로서가 아니고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행한 일이다.

 

전쟁에 나가 포로가 되어 여기에 서게된것이니

나는 미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틀후 1910년 10월 14일 관동주 뤼순 관동도둑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게된다.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노모(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청하였고, 자신의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키원달라고 부탁한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어머니가 만들어준 수의

안중근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하얀 두루마기(수의)를 입고,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날 검은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모를 사형장으로 끌려가 사형에 처해진다.(1910년 오전 10시, 안중근 31세)

[일본은 안중근을 사형시킨 시간을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시간(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마춰서 사형 시켰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옥중에 있는 아들을에게,

안중근 어머니

"내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죽는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일재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새에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선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라고 아들(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냈다.

 

 

 

 

 

 

안중근 의사 후손

안중근의 부인은 김아래 이며, 둘사이에는 2남 1녀를 두었다.

 

안중근은 의거를 하기전 미리 가족들을 연해주로 도피 시켰으며, 유승렬 선생이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안정적으로 지내는듯 하였으나, 결국 남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안중근 큰아들은 남이 주는 과자를 먹고 독살당하였다고 한다.

 

안중근 부인 김아려, 장남과 차남 준생

독립운동가이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조금씩 도와주다가, 김구선생 도움으로 생활이 조금 안정된듯 보였지만 계속해서 끝없는 도피생활이 이어지고, 안중근 의사 둘째아들 안중생은 일본 총독부의 꼬임에 빠져 '이토 히로부미'아들을 찾아가 사죄하과 눈물로 악수하는 헤프닝까지 벌이게 된다.

 

 

이에 김구선생은 안준생을 중국 정부에다 민족의 반역자로 처단해 줄것을 요청하였지만 중국은 이매한 태도를 보였으며, 이후 해방이 된후 안중근 의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삶이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 가문의 가족중 40여명이 독립운동이 참여하였고, 그중 11명이 독립유공인에 등록되었다.

 

 

 

 

 

안중근의사 무덤

안중근 의사가 죽은후 가족은 일본에게 신신을 돌려 줄것을 요구하였지만, 일본제국은 안중근의 죽음이 독립운동에 불을집힐수가 있어서 그것을 염려하여 시신 인계를 거절하였고, 무덤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 무덤에 관해 여러소문이 무성이 떠돌고 있지만,

 

  '만주지역 신문에 따르면 일본이 관리하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될것'(1910년 3월 30일 성경시보中)이라는 내용과 안중근 의사 동생이 감옥관리자에게 사정하여, '감옥관리자가 하얼빈의 소나무로 만든관에 안중근의사 유해를 안치하고 안중근 의사 동생이 절을하고 조선의 법에따라 고별식을 치르도록 허락했다"성경신보에서 전해진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중국 하얼빈에 하얼빈 역사를 개조하여 만들어져 안중근의사 일대기가 기록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에 안중근의사 101주년을 기념하며 서울남산 중턱에 안중근 의사 동상이 세워지고, 건물도 새로 건립하였다.

서울 남산 안중근 기념관

 

 

참고로

도시락 폭탄은 안중근 의사가 아니고 윤봉길 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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