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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과 을사오적(을사오적 다섯명 누구? 환수재산 얼마?)

행복한글쓴이 2022. 10. 18.

1905년 을사늑약 문서
친일파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와 대한제국 관료들
을사늑약 을 강요하는 일본제국을 조롱하는 만평
고종의 반대에도 을사조약을 체결한 장소,덕수궁 '증명전'

 

을사조약

을사조약은, 을사년 (1905년 11월 18일 새벽)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포위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대한제국 관료들은 처음에는 반대하지만 이완용의 선두로 박재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5명이  앞장서서 찬성하며 '을사조약'에 서명한다.  

 

을사조약에 앞장선, 을사오적 왼쪽부터(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박재순)

 

왼쪽부터 [내부대신 이지용, 행정안전부장관]  [군부대신 이근택, 국방부장관]  [학부대신 이완용, 교육부장관] [외부대신 박제순,외교부장관]  [농상공부대신 권중현,농림축산+ 산업통상부장관] 이 '을사늑약'에 서명한 5인이 '을사오적' 이라 한다.


친일파 이완용의 어록
친일파 이완용의 후손들 (왼쪽에서 세번째가 서울대 총장 '이장무')

 

을사오적 

 

1) 이완용(1875년 7월 17일 ~ 1926년 2월 12일)

친일파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3관왕에 다 포함된 다

 

이완용은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이석준 어머니(영산신씨) 사이의 2남 3녀 중에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10세에 33촌 지간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 권력의 핵심부로 가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호준은 흥선대원군과 사돈지간 이며 이완용은  '순종황제' 세자시절에 세자의 스승이 된다. 그후 조선의 학부대신을 지내면서 친일의 선두에 섰고,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까지 다 참여한(3관왕)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 이다. 또 이완용은 독립협회 2대 회장출신 이기도 하다.(독립협회 회장이 매국노가 됨)

 

 

이완용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일제로 부터 높은 관직과 1등 작위까지 하사받으며 보상금 또한 현시세로 약100억 가량을 받았다. 이완용이 소유하고 있던 땅은 여의도 면적에 7배 가량 되었고 이완용은 죽기전 그 땅일부를 팔아 아들 '이항구' 에게 상속하였다.

 

 

이완용의 아들과 손자

'이항구'는 일제강점기 시절 방탕하기로 유명 하였으며, 이항구의 아들 즉 이완용의 손자 까지도 일본에게 작위를 하사 받았고 이완용의 손자들은 중,일 전쟁당시 징병을 차출하고 홍보하며 일제에 헌금을 하는등 친일행위에 앞정섰다고 한다.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

이완용은 1926년 67세로 사망하였으며, 1993년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은 국가가 환수한  토지(이완용 때 부터 대대로 내려온 땅)를 되돌려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낸다. ('이윤형'은 소송에서 승소한다)

토지 반환소송을 낸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
이완용의 증손 '이윤형'의 땅 반환소송 승소

이윤형은 승소에서 이긴 '북 아현동' 땅만을 처분해 현금화 하였는데 그 금액이 30억이나 되며, 그돈의 행방은 오리무중 이라한다. (이윤형은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 을 역임하였다)

 

 

 

 

 

 

2) 박제순(1858년 12월 7일 ~ 1916년 6월 20일)

을사오적,경술국적에 해당하는친일파 '박재순'
친일파 박재순의 손자 '박승유'가 입대한 광복군

박제순은 본관은 '반남' 이며 과거 급제후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냈다. 박재순은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중 '동학농민운동' 발생시  '경군'(조선시대 군사)과 함께 동학농민군 진압에 협력 하였다. 조선에서는 '외부대신' 을 하였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내부대신'을 지냈다고 한다.

 

 

박제순은 을사오적(1905년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일제가 조선의 지배을 합법, 서약) 과 경술국적(1910년 대한제국 주권전부를 일제에 넘기는 서약) 에 해당하며  친일파들 중에서 글을 가장 잘 썼으며 교활 하기로는 최고 였다고 한다. 박제순은 같은 친일파들 에게는 가장 온건하다고 욕을 먹었으며,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개인의 신변에 위험을 느껴 일본으로 건너간다. (박재순은 을사조약때 "외교권은 안되오" 하다가 겁먹고 서약)

 

 

박제순의 아들과 손자

박제순은 일제로 부터 현시세로 20억의 포상금과 함께 매월 연금도 받았으며 박제순 아들 박부양은 일제강점기때  20세 나이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고 한성은행 대주주 이기도 했다.

 

 

박부양의 아들 즉 박제순의 손자(박승유 1924~1990)는 1994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박부양의 권유로 졸업과 동시에 일본군으로 입대해 '중국저장성 이우'에 주둔한 황정부대에 배치 되었으나, 탈영하여 가명으로 한국 광복군에 입대 하여 활동하였다.

 

박승유는 해방후 서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고 성악가로 활동하다가 강원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3)이근택(1865년 9월 30일 ~ 1919년 12월 16일)

친일파 을사오적 '이근택'
이근택의 증손자 '이상우'

이근택은 성종의 9남 경명군의 12대손으로 어영청 파총 이승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2년 임오군란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하여 명성황후 민씨의 눈에들어 민씨가 환궁하면서 이근택도 벼슬길에 올랐다.

 

이근택은 이완용의 주도한 을사조약 체결에서 적극적으로 지지의사를 밝히면서 을사오적이 되었다. 이근택의 형제는 물론 아내의 친척들 까지도 친일집안 이며 이근택의 증손자 중 한명(이상우)은 공주대학교 총장(제2대)을 역임하였다.(집안이 다 친일파여서 5귀라고 불리었다)

 

 

4) 이지용(1870년 10월 23일 ~ 1928년 6월 28일)

친일파 을사오적 '이지용'
을사오적 이지용
조선시대 기생들
을사오적 이지용의 첩을 사양하고 죽음을 택한 '기생 산홍'

이지용은 전주이씨 왕족이며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의 손자이다. 이지용은 1881년 흥인군의 아들 이재긍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지용의 본래 이름은 이용구→이은용→이지용으로 또다시 개명 하였다.

 

 

이지용은 1887년 문과에 급제 하여 경부대신 서리를 맡고 1901년 주일공사를 지내다 1904년 2월 외부대신 으로 지내며,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로 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1904년 일본제국이 대한제국과 동맹한다는 외교문서) 에 서명한다.

 

이지용은 맘에 드는 기생이 있어 그 기생을 첩으로 삼으려 하자 기생 '산홍' "역적의 첩이 되기 싫다" 며 거절 하였고, 나라를 팔아먹은 댓가로 받은돈도 도박으로 다 날려 버렸다고 한다.

 

 

 

 

5) 권중현(1854년 11월 27일 ~ 1934년 3월 19일)

친일파 을사오적 '권중현'
친일파 권중현이 받은 한일합병 기념증서

 

권중현은 권율의 9대손인 아버지 권홍섭, 충무공 이순신 9대손 어머니(덕수이씨) 사이에 태어난 5남 1녀중 차남이다. 권중현은 공신가문의 후손으로 음서(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관리로 채용)로 관직 생활을 시작 하였다.

 

 

조선 후기에 권중현은 일찍 일본어를 익혀 친일 개화 관료의 길을 걷는다. 1883년 일본 주재 서기관 등을 거쳐 1891년 인천항 방상통상 사무를 지냈고 한성부윤, 의정부참찬, 표훈원부총재를 거쳐 1899년 법무대신으로 오른다.

 

1904년 러 일 전쟁에서 권중현은 일본군 위문사로 파견되는 등 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 부터 훈1등 서보대수장(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을사조약때 궁궐을 둘러싼 일본군
을사조약 찬성과 반대 인물들
을사늑약 체결후 대한제국 관료들과 일본제국 대표들의 '기념촬영'

 

을사오적 재산 환수 내용

(친일재산조사위백서, 환수결정당시 2006년~2010년 기준, 공시기가기준)

대상자  직책 금액
이완용 학부대신 6961만원(16필지)
박재순 외부대신 없음
이근택 군부대신 1539만원(9필지)
이지용 내부대신 16만 9000원(16필지)
권중현 농상부대신 3652만원(10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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