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조선의 대표적 신 여성 이면서 조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 나는 말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 화가 나혜석 -
- 1919년 3월 나혜석의 첫소설 -
첩이 있는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못한 죄이예요
그러니깐 예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수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것은 무엇이든 하는 세상이예요.
여자라는것 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오냐, 사람이다.
(나혜석 소설 '경희' 의 일부분) 위↑
나혜석 도쿄 여자미술대학 2학년 재학시절, 조선 유학생 들의 잡지 '학지광' 에 글을 발표한다.
이상적 부인 〓 양처현모라 이상을 정함도 여자를 노예 만들기 위하여
1920년 4월 10일 (나혜석 24세 , 변호사인 김우영과 정동제일교회 예배당 에서 결혼)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한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완연히 탕 하는 것같이 들리었다"
(1923년 잡지 '동명' 中)
- 모(母)된 감상기 -
(나혜석이 어머니가 되다)
나는 할일이 많았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뜨일려 하는 때였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것이 인생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 해야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일이 타인에게 미룰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1923년 잡지 '동명' 中)
- 1921년 4월 28일 (나혜석 나이 25세,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 -
"어머니 나 죽겠오
여보 그대 나 살려주오
내 심히 애걸하니"
"옆에 팔짱끼고 섰던 부군 "참으시오" 하는말에
이놈아 듣기싫다, 내 악쓰고 통곡하니
이 내 몸 어이타가 이다지 되었던가"
(1923년 잡지 '동명' 中)
이러한 고통을 견딜수 없는 고통이
기(氣) 개월간 계속 되더니
심신이 피곤은 인제 극도에 달하여
정신은 광증에 달하고 몸에는 종기가 끊이지 않았다.
자식은 모(母)채에 살점을 떼어먹는 악마.
(나혜석 자식을 악마라고 표현)
- 나혜석의 모된 감상기를 접한 '백결생'은 -
"물론 임신이란 것은 두려운 사실이요, 그리 편한 일은 아니요,
그러나 결혼 그 자체부터 부인하고 회피 하기 전에는 불가피 한것이다"
"그뿐 아니라 원래 임신 이란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있고
여성이 인류를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 의 한가지 인것을 자각 하여야 할것이다"
(1923년 2월 4일 백결생, 잡지 '동명' 中)
- 백결생씨의 말에 나혜석의 화답은 -
"과연 마치 구름속에 있는 양반에게
너희는 왜 흙을 밟고 다니느냐 하는 비방을 받는 격이 됐다.
'씨'의(백결생씨) 임신이란 것은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 라는
일구를 보면, 씨가 능히 알지 못할 사실을 아는체 하려는 것이
용서치 못할 점이다"
(1923년 3월 18일 잡지 '동명' 中)
- 나혜석 드디어 모성애 눈을 뜨다 -
모성애로 인하여 얼마나 만족을 느꼈으며
행복 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과연 하나 기르고 둘 기르는 동안
지금까지의 애인에게서나 친구 에게서나
맛보지 못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 나이다
(1923년 9월, 잡지 삼천리 中)
- 화가로서 어머니 로서 최선을 다한 나혜석 -
나는 결코 가사를 범연히 하고
그림을 그려온 일은 없습니다
내 몸에 비단옷을 입어본 일이 없었고
1분이라도 놀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1923년 8월 잡지 삼천리 中)
- 붓을 놓지 않은 나혜석 -
다다미 위에서 차게군 까닭인지
자궁에 염증이 생하여(생겨)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또한 매일 병원에 다니기에
이럭저럭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돌아오도록
두어 장 밖에 그리지 못하였다.
(1926년 5월 20일 조선일보 中)
(나혜석은 아이를 낳은 후에도 그림을 꾸준히 그려 '조선미전 에서 여성최초 특선, 까지 하였다)
내게는 근일 고통이 되다시피
그림에 대한 번민이 생겨서
화필을 들고 우두커니 앉았다가
그만 두고 그만 두고 한 때가 많다
나의 그림은 기교에만
조금씩 진보될 뿐이요
아무 정신적 진보가 없는 것 같은것이
자기 자신을 미워할 만치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1926년 5월 20일 조선일보 中)
- 1927년 나혜석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다 -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을 다니고
빵이나 차를 먹고(마시고) 침대에서 자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될
공상도 해 보았다
.(1932년 1월 잡지 '삼천리' 中)
- 나혜석 1년 9개월 유럽여행을 마치고 부산항에 귀국하다 -
이제야 정말 양화(서양화)에 눈이 떠지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헛일을 한 듯해요
헛 그림을 그린듯 후회 납니다
(1930년 5월 잡지 삼천리 中)
- 나혜석 파리에서 최린과 사랑에 빠지다 -
(최린 : 3.1 운동당시 민족 대표 33인중 한명으로 천주교도 대표)
과거지사, 현시사, 장래지사를
논하는 중에 공명되는 점이 많았고
서로 이해하게 되었사외다.
결코 손을 대서는 아니된다고 한 과실에
손을 댄 것은 뱀의 유혹이었고
이브의 호기심이 아니었나.
나는 확실이 유혹을 받았었고
나는 확실이 호기심을 가졌었다
우리는(나혜석과 최린) 형무한 형극의 길가에서
생각지 않은 장미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방향과 밀봉중에 황홀하였던 것이다.
(1934년 8월 나혜석의 이혼고백서 일부)
- 나혜석 이혼 당하다 -
어디로 갈까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 홀로된 몸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1934년 9월 이혼고백서)
- 나혜석 35세 접어들다 -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 질지라도 '필사의 쟁투' 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 하면서 재기
하려 합니다
(1934년 9월 이혼고백서)
- 나혜석 제기하다 -
(1931년 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1931년 제 12회 일본제국미술전람회 입선)
이로 인하여 나는 면목이 섰고
내 일신의 생계가 생겼나이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 하였나이다
그때에 나는 퍽 행복 스러웠사외다
(1934년 9월 이혼고백서)
- 나혜석 또다시 무너지다 -
(조선미전 에서 특선한 작품을 가지고 조선 남성들의 혹평이 쏟아짐)
"이러한 것을 출품한 작자의 사상이 의문이요.
출품을 하였더라도 그것을 진열하여 놓은자의 심사를 모를 일이다.
우대를 한 것이냐? 모욕을 한 것이냐?
불미한 작품에 특선 딱지를 붙여서는 안될것이다"
(1931년 6월 3일 매일신 中)
- 나혜석 남자의 이중성을 말하다 -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 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뺏앗으려고 합니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1934년 8~9월 이혼고백서)
- 나혜석 '이혼고백서'를 비난받다 -
"필요 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적입니다.
더욱이나 당신은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증 광태'를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선 여성들이 나혜석의 '이혼고백서'를 비난하다, 1934년 잡지 신가정 中)
- 나혜석 다시 좌절하다 -
세상에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에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들을 잃은 나는
황야를 헤메고, 임야(어두운밤)에 공막(멍하니)을 바라고
자실하여 할 뿐입니다.
(1934년 8월 이혼고백서)
- 나혜석 '최린'에 위자료 청구소송 걸다 -
(최린의 압력으로, 나혜석 위자료 청구 내용이 신문에서 삭제되다,
(1934년 9월 20일 동아일보 中)
나혜석의 반박 →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
(1935년 2월 삼천리에 실림)
나혜석 작은오빠 나경석(1890 ~ 1959)은 나혜석에게 소문이 좀 잠잠해 질때까지
조용히 자숙하고 있다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라고 조언 하였으나,
나혜석은 오빠 조언을 듣지 않고 계속 사회와 맞서 싸웠다.
- 나혜석 글을 멈추지 않는다 -
때로 살아 있다는 것이 괴롭고
더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이 축복 이란다
살아 있기에 자살도 생각해볼수 있는 일이고
가끔 오욕스럽게 느껴지다가도 살아 있었기에
다행 스러운 기쁨을 맛보는 때도 있거든 (라훌라의 사모곡)
(라훌라 사모곡,의 뜻이 너무길어 생략)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을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가 있다하면
우리는 안심이오.
아아! 아무려나 나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든지
진흙에 미끄러져 망신을 당하든지 나가 볼 욕심이오(학지광)
(학지광→ 조선유학생 학우회회보)
- 무연고자가 된 나혜석 -
1947년 나혜석은 경기도 안양 경성보육원 에서 머물면서 '화가박인경'을 만난다.
그때 박인경은 대학생으로 경성보육원에 자원봉사를 왔었던 때이다.
나혜석은 원고 뭉치를 박인경 에게 주면서 정서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원고를 본 박인경 은 이렇게 회상한다.
"나혜석은 병이들어 손이 떨려 글체에 힘이 전혀 안들어 갔으며,
그 원고는 나혜석이 파리로 여행갔을때 행복했던 내용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때 나혜석의나이 51세)
그후 1948년 12월 10일 오후 8시 30분 서울시립 자제원 에서 행려(무연고)로 사망한다.
나혜석의 사망당시 가진것은 헌옷 한벌이 전부였다고 한다.
2022.10.11 - [나누고 싶은 글] - 나혜석 - 우리나라 최초의 천재 서양화가(ft. 결혼, 불륜, 최린, 무연고자? 나문희)
2021.06.03 - [스타 이슈] - 한예슬 - 10살 연하 남친 호스트빠 출신? (ft. 프로필, 버닝썬 여배우? 국적)
2022.09.28 - [나누고 싶은 글] - 박민영 프로필 (ft.열애설, 재력가 강종현, 결혼, 성형, 검정고시?)
2023.08.13 - [대한민국 인물 열전] - 김만덕 - 조선시대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행한 제주기생 (ft.객주, 명언, 정조, 기념관)
2023.08.20 - [스타 이슈] - 정혁 - 기초생활 수급자 였다? (ft.모델, 집, 아버지, 어머니, 살림남, 과거)
'나누고 싶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기즈칸 무덤의 행방? (징기스칸의 태몽, 본명, 영토, 명언) (0) | 2022.10.19 |
---|---|
을사조약과 을사오적(을사오적 다섯명 누구? 환수재산 얼마?) (2) | 2022.10.18 |
나혜석 - 우리나라 최초의 천재 서양화가(ft. 결혼, 불륜, 최린, 무연고자? 나문희) (2) | 2022.10.11 |
김호중 음주 뺑소니후 도주 논란(ft.나이 대학 프로필 군대, 소속사, 은사님) (0) | 2022.10.10 |
서태후 - 중국 희대의악녀, ( ft 모유를먹다? 실제얼굴, 미소년?? ) (0) | 2022.10.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