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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화가 시인 작가)일생 업적 사망 무연고자 설명 대표시 아들 김건 나문희

행복한글쓴이 2022. 10. 11.

 

 

 

나혜석
나혜석 자화상
나혜석 학창시절

 

나혜석 (羅蕙錫)

 

(1896년 4월  28일 ~ 1948년 12월 10일)

서양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이다.

 

 

출생 : 1896년 4월 28일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 현재,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아호 : 정월

 

부모 : 아버지(나기정), 어머니 (최시의)

형제, 자매 : 2남 3녀

 

본관 : 나주 나씨

 

학력

삼일소학당 (졸업)

진명여학교 (졸업)

도쿄여자미술 전문학교 (서양화 / 졸업)

 

 

남편 : 김우영 (1930년 이혼)

자녀 : 장녀(김나열), 장남(김선), 차남(김진), 삼남(김건)

 

나혜석(좌측) 과 부모님
(좌측)나혜석, 큰오빠(나홍석) 작은오빠(나경석) 여동생(나지석) 이복언니(나계석)

 

 

 

 

 

 

 

나혜석 집안

나혜석은 명문가 집안으로  아버지 나기정 어머니 최시의 사이에서 2남 3녀중에 넷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 나기정(1863 ~ 1915)은 구한말 사법관을 지내고 시흥군수를 거쳐 용인군수를 역임했다.

 

 

또 나기정은 몇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이복언니 나계석의 생모였고, 또 다른 한명은 나혜석과 또래였으며, 나혜석이 사춘기 무렵에 나기정은 또 첩을 들이는데 나혜석 보다 한살더 많았다.

 

 

그로 인해 나혜석 어머니 최시의는 묵묵히 참으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나혜석 아버지 나기정은 사대부 집안의 보수적인 사람이었으나, 교육만큼은 남,여 구별없이 차등을 두지 않아 모두 신교육을 받게 하였다.

 

 

나혜석은 1910년 삼일여학교 재학중에 월간지 삼천리 '개벽'을 위해 단색목판화 (나무 목판에 글을 세겨 찍어내는것) 를 제작하였다.

 

 

나혜석은 여학교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와 목판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러는 동생을 작은오빠 나경석(1890 ~ 1959)이 언제나 나혜석을 도와 주었다고 한다.

 

 

삼일여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나혜석 일본 유학시절 첫사랑

나혜석은 1913년 최고의 성적으로 경성부의 진명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가있는 작은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나혜석도 일본 유학을 가게된다.

 

 

1914년 4월  '매일신보'는 나혜석에 관해 기사를 싫었다. 남자도 대학가기가 어렵던 시절  일본 유학까지 떠난 나혜석은 선망을 받는 그시대의 스타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 유학생이었다.

 

 

나혜석은 일본 도쿄 남쪽 사가미 하라시 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에서 서양화과 고등사범과를 공부하며 성적이 우수해 신문에 나기도 하였다.

(도쿄여자미술대학은 일본의 5대 미술 대학중 하나이면서 100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 학교이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  오빠 나경석의 친구 최승구와 사랑에 빠지지만 오빠 나경석은 최승구의 집안 배경 좋지 않아  최승구를 탐탁지 않아 여긴다.

 

 

그러던중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나혜석 일본 유학시절 (당시19세)
나혜석 일본유학시절 첫사랑 최승구

 

 

 

 

 

 

 

 

나혜석 미술활동 과 3.1운동

나혜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18년 3월), 목판화 삽화작업에 몰두하여 당대 일상속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특히 여성들을 주재로한 풍속화를 많이 남겼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저것이 무엇인고' 이다. 이시기에 나혜석은 시, 소설 등 문학에도 손을 뻐치며 각종 잡지 신문등를 통해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며 새간의 주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나혜석은 사회문재에 참여하며 당대 지식인들이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간직하고 있어고 나혜석 또한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 형무소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나혜석의 목판 대표작 '저것이 무엇인고'

 

위, 그림 해석 : 젊은 여자가 바이올린 가방을 들고 지나가니, 위에 선비 두사람과 아래 남자 한명이, "저 가방이 무엇인고" 하고 묻는것이다.

 

나혜석의 목판 중 여자들의 일상 풍속화

 

 

 

 

 

 

 

나혜석의 결혼

나혜석이 20대 중반이되자 집안에서 결혼을 서두르자 작은오빠 나경석 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한 김우영(당시 변호사)을 만난다.

 

 

김우영의 적극적인 구애에 나혜석은 결혼을 결심하고, 나혜석은 김우영 에게 조건을 제시한다.(김우영은 본부인과 딸 하나를 두고 사별 하였다)

 

 

첫째 지금처럼 사랑해 줄것,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말것,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딸과 함께 살지 않는것, 넷째 나혜석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것, 김우영은 이조건을 모두 받아 들이고 1920년 4월 10일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에서 나혜석과 결혼한다.

 

1920년,김우영과 나혜석 정동제일교회 예배당 에서 결혼식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신혼시절

 

 

나혜석은 결혼을 하고도 매회 '조선미전' 에서 진행되는 전시회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 하였고 어김없이 입선하였으며 1926년 에는 '특선' 의 영광이 나혜석에게 주여졌다.

 

 

여류화가 로서는 최초였다.

 

 

나혜석의 성공은 남편 김우영의 명예 이기도 하였다. 나혜석은 독특한 화풍과 기법은 미술계의 소문이 나 1921년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나혜석의 유화작품 70여점과 서양화 개인전을 열개되며 쏟아지는 관심속에 전시작품 3/1이 판매 되었다.

 

나혜석 화가 작품들중 일부

 

 

 

 

 

 

 

나혜석 출산과 해외여행

(나혜석은1925년 4월 28일 첫 아이 장녀(김나열)을 낳는다)

 

나혜석은 아이낳는 그날의 고통을 이렇게 적고이있다. "어머니 나죽겠소, 여보대 나 살려주오, 내심히 애걸하니 내 옆에 팔짱을 끼고 섰던 부군이 "참으시오" 하는말에 "이놈아 듣기싫다 " 내 악쓰고 통곡하니 이 내 몸 어이타가 이다지 되었던가" 나혜석은 첫딸을 낳고 아이셋을 더 낳았으며, 아이들과 가사활동 작품활동에 병행이 쉽지 않았다.

 

 

나혜석이 31살 되던 해에(1927년)  남편 김우영은 유럽일주 여행을 제안한다.

 

 

그 당시 칠순 노모와 세아이가 있었지만 나혜석은 결단을 내려, 부부는 1년 9개월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대륙을 건너 모스크바와  바르샤바, 베를린을 거쳐 한달뒤 동경하던 파리에 도착한다.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유럽여행

 

나혜석에게 파리는 캠버스 였다. 도시 곳곳이 예술품이고 박물관 미술관에 있는 대가들의 작품은  천재 화가 나혜석에겐 눈을뜨게 하고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파리에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마티스' 같은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나혜석은 '야수파' 화풍을 공부하기 위해 야수파 화가 '로제 비시에르' 가 운영하는 화실에서 공부를 하게되며 이후 나혜석 자화상에서 '야수파' 화풍을 엿볼수 있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며, "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빵이나 차를 먹고(마시고), 침대에서 자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사랑의 꿈도 꾸었고, 장차 그림의 대가가 될 공상도 해보았다" (1932년 1월, 잡지 삼천리 中)

 

 

나혜석은 파리에서 6개월간 머물다, 미국대륙을 횡단하며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주요 도시를 여행하고 태평양를 건너 부산항에 도착 하였다. 1년 9개월 만이었다. 나혜석은 "이제는 정말 양화(서양화)에 눈이 떠지는듯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헛일을 한듯해요, 헛그림을 그린듯 후회납니다" (1930년 5월 잡지 삼천리 中)

 

 

나혜석은 귀국후 동래 시댁으로 들어간다. 남편 김우영은 "서방질 하는것 하고 어찌 사느냐" 며 이혼을 요구한다.

 

 

 

 

 

 

 

 

나혜석 불륜 그리고 이혼

나혜석은 한국 유학생 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파리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최린'(3.1운동 당시 민족대표33인중 한명)을 보고 첫눈에 반해 두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져 사랑에 빠졌다.

 

 

프랑스어를 몰랐던 두사람은 통역사를 고용해 식당, 극장, 뱃놀이, 시내 구경을 다녔으며, 1928년 11월 20일 두사람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나혜석 숙소인 '셀렉트' 호텔에서 함께보낸다,

 

 

그런관계가 수십번 이어졌고 파리 한인사회 유학생 들에게 나혜석은 '최린' 의 작은댁 이라고 불리어진다.

 

 

파리 여행중 나혜석
최린

 

나혜석은 " 결코 손을 대서는 아니된다고 한 과실에는 손을 댄것은 뱀의 유혹이었고 이브의 호기심이 아니었나, 나는 확실히 유혹을 받았었고, 나는 확실히 호기심을 가졌었다"

 

 

"우리는 황무한 형극의 길가에서 생각지 않은 장미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방향과 밀봉중에 황홀하였던 것이다".(신생활에 들면서 1935년 2월) 

 

나혜석과 최린의 스캔들이 신문에 남

 

 

나혜석 남편 김우영은 나혜석이 연애 한다는 소문을 듣고 몰래 파리로와 최린과 나혜석이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고 김우영은 복수라도 하듯 새로운 여성과 신접 살림을 차린다.

 

 

나혜석은 김우영 에게 결혼전 약속을 들먹이며, 이혼을 안하려 했지만 김우영은 나혜석과 최린을 간통죄로 고소 하겠다고 협박하여 둘은 1930년 11월 경성법원에서 나혜석과 김우영은 이혼하게된다.

 

 

아이들의 양육권을 김우영이 갖는 바람에 나혜석은 아이들을 전혀 볼수가 없었고, 아이들을 보려고 노력을 해 보았지만 번번히 실패 하며 김우영이 자식들이 어머니 와의 만남을 반대 하였다.

 

 

 

 

 

 

 

 

 

나혜석 무연고자 되다.

나혜석은 이혼후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이혼 고백서' 를 발표하여 대중들 에게 알렸다.

 

 

 "그러나 인생은 가정만도 인생이 아니요, 예술만도 인생이 아니다" 라고 '이고백서'에 자신의 결혼과 최린의 관계까지 솔직히 말하였다.

 

 

나혜석은 자신의 연애 관을 담아내며 조선의 불평등한 남,여 관계와 정조에 관한 이중성을 대중들에게 알리었다. 

 

월간지 삼천리
잡지 삼천리에 실린 나혜석이 올린 '이혼 고백서'

 

 

그러나 그당시 조선은 이러한 내용(이혼고백서)은 조롱과 비난 뿐이었으며, 나혜석은 그런 비난 속에서도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했었다. 

 

 

또한 미술학도를 위해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해 제자 양성에도 힘을 썼지만 그에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술계와 언론계에서 냉대를 받았다.

 

 

나혜석은 점차 자신감을 잃어갔고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시달렸으며, 형편마저 어려워져  말년에는 자식들을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자식들이 어머니 나혜석 보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나혜석은 "어디로 갈까, 집도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 홀로된 몸, 어디로갈까 어디로갈까" (이혼고백서, 1934년 9월)

 

 

1949년 3월 14일 '대한민국 관보' 에는 한 여성에 대한 '행려병자,(가족이 없는 무연고) 에 대한  부고를 싫었다.

 

 

그 부고가 나혜석 사망 석달 만이었다. 나혜석은 단 한사람의 배웅도 받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나이 53세, 본적, 주소도 미상, 가진 거라곤 헌옷 한벌뿐, 남긴것은 이름석자 나혜석(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갈곳이 없어 결국 길에 쓰러져 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한다.

(병원 관계자는 처음에 나혜석인줄 몰랐며, 나혜석은 자기 본명을 숨기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나혜석과 네자녀들, 첫재(김선), 둘째(김진), 셋째(김건), 딸(김나열)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김우영

 

 

나혜석과 나문희

나혜석 큰오빠 나홍석은 큰아버지댁에 양자로 들어가, 1909년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다.

탤런트겸 배우 '나문희' 는 나홍석의 손녀이다.

 

나혜석은 나문희가 조카 손녀이며, 나문희 에게 나혜석은 고모 할머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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